![](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hf7Iwd5zzw9SMIBLTCI0apMhQKregibePJQBFL1PB6booJHguCLrWHVhyphenhyphenwE2l-IK7mZagobb15vkYGCPrIBuMweuy1D3KV7SThWLLjTrKCHtFNDBuN4hkCQ2GfkD0NS38bg5p2keUT5vHb/s400/11.jpg)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제 1절 나의 어린 시절 저의 고향은 남한의 명산인 지리산과 어우러져 있는 경남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중하쌍 부락이라는 60호 정도 되는 작은 산골마을입니다 처음에 저희 집은 아버지께서 지리산에서 숯을 구워 시장에 내다 팔아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나마 가산을 꾸려갈 수 없어 중하쌍 부락 건너편에 집이 두 채밖에 안 되는 구덕골의 윗집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바로 그 쓰러져 가는 작은 초가집에서 부친 박복식씨와 모친 정남시씨의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이 세상에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남의 농토도 임대해서 농사를 짓고, 산에서 숯도 구워서 팔고, 나무도 해 가지고 시장에 팔아서 끼니를 때웠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봄에는 쑥을 캐어서 쑥밥을 해 먹고, 산의 소나무껍질을 벗기고 칡을 캐어 먹고, 일본사람들이 거름으로 사용하는 콩기름을 짜고 남은 콩 찌꺼기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습니다. 그 때 우리 7남매는 무밥, 감자밥, 고구마라도 배부르게 먹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어려운 가산 때문에 아버지는 매일 술로써 시름을 달랬습니다. 그러나 동네에서 제일 인정스러운 분이셨고 일을 할 때에는 동네에서 부지런하기로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3,500평 의 논밭을 사게 되었고 농사를 지어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가정 환경 탓에 2살 때에는 홍역과 황달로 온몸에 부스럼 이 생기며 사경을 헤맨 때도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언제나 욕심이 많고 고집이 세며, 싸움을 해도 지지 않으려는 승부근성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가정을 탓하지 않고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전, 오후 각각 한번씩 나무를 하고 풀을 베는 일을 지만, 저는 하루에 세 번씩 일을 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저는 소를 산으로 끌고 다니며 풀을 먹이고, 아침저녁으로 소죽을 끓여서 먹였습니다. 돼지 밥과 닭 먹이를 주는 것도 항상 제 몫 이었습니다. 먼 거리의 우물에서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어오는 것도 저의 일과였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한 꼬마로 통했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효도하려고 심부름도 잘하고 팔다리도 주물러드렸습니다. 어쩌다가 돈 10원이라도 생기면 할머니에게 드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그 돈을 모아 놓았다가 저에게 용돈으로 주셨고 엿 장사가 오면 엿도 사 주시고 과자도 사 주셨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제 2 절 잊지 못할 억울한 누명 초등학교 4년 때 잊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체육을 하고 반 친구들과 같이 교실에 들어오니 '박용진' 선생님이 저를 지목하여 돈 30원을 훔쳤다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저는 해명도 못하고 누명을 뒤집어 썼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저는 분한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는 왜 변명 한 마디 못하였는지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왜 박용진 선생이 저를 지목하여 누명을 씌워 학생들 앞에서 망신을 시켰는지 지금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며칠 후, 우리 동네에 사는 같은 반 배정순이라는 여학생이 하옥실이가 체육시간에 당번을 하면서 돈 30원을 훔치는 것을 보았다. ' 고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며칠이 지난 후여서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누명을 쓴 채 말도 못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친구들 중에는 병으로 죽는 일이 많았습니다. 절친했던 동네 친구 박준국이 폐병으로 죽었고 이어서 유영이라는 친구도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어린 나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같이 뛰어다니며 웃고 떠들며 놀던 친구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너무나 가슬 아프고 슬펐습니다. 제 3 절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중학시절 저는 두 학급만 뽑는 양보중학교 시험에 합격하여 1963년 3월부터 집에 서 학교까지 왕복 20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까밖 고무신을 신고 책 보따리를 허리에 매고 놋쇠 사발에 밥을 넣어 갖고 다떠 서 창피했는데 중학교 때부터는 양은 도시락을 갖고 다녀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콩나물 시루같이 가득 태운 GMC 군 트럭 이 과속을 하다가 장암리에 있는 양보초등학교 앞 작은 개울에서 전복사고를 일으켰습니다. 브레이크도 소용없이 트럭은 개울 위로 날아가 아름드리 벚꽃나무를 두동강이 내며 추락했습니다. '쾅' 하는 순간 차를 타고 있던 학생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차바닥은 순간 피로 넘치고 고통의 신음소리도 가득차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이 사고로 왼쪽편에 탄 13명의 착생들이 심하게 다쳤습니다. 다친 학생들은 하동 읍내 작은 의원으로 후송되었는데 저의 왼쪽 팔도 부서져 버렸습니다. 저는 어깨 죽지까지 뼈만 앙상하게 남고 팔 관절이 부서지고 손바닥까지 뼈가 드러난 것을 보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식을 잃어가면서 저의 왼팔로 피가 쏟아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며 3일 후에야 깨어나 아버지와 어머니를볼 수 있었습니다 장마 때문에 보리가 썩어 마당에 말리고 있는 중 아버지, 어머니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그 날 신문에도 우리의 교통사고가 보도 되었습니다. 교통사고는 저의 인생이 온갖 멸시와 천대, 행동의 부자유, 생활의 고통.아픔이 동반된 생지옥 같은 생활이 되는 출발점 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막 태어난 막내 동생 준서와 그 위로 여동생 영희가 걱우 걸음마 할 정도였습니다. 저의 사고로 어머니가 간병을 하기 위해 병원에 계셨기 때문에 그 때부터 8개월 동안 준서는 젖을 먹지 못하고 영희와 다른 동생들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동생들에게 죄인 같은 심정 입니다. 학생 13명이 다쳤기 때문에 학교 뿐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병 문안을 왔습니다.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도 많이 왔습니다. 지금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폐병으로 돌아가신 영어 선생님이 가장 병 문안을 많이 오셨고 자식이 사고를 당한 것처럼 가슴 아파해 주셨습니다. 하동의원 의사는 아버지에게 저의 팔 관절이 완전히 부서져서 가루가 되었기 때문에 어깨 죽지까지 잘라야 찬다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팔을 붙여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사는 뼈가 부서진 관절과 팔 뼈들을 모아 대강 붙이고 살을 바늘로 꿰매 놓았습니다. 그러나 팔은 계속 썩어 들어갔습니다. 한 달 동안 하동의원에서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꼼짝 못하고 누워 있다가 부산 오 육군병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 육군병원에 도착해서 처음 진료한 군의관들이 '팔의 뼈가 굳기 전에 병원에 왔더 라면 어느 정도 나을 수 있었을 것을 무지해서 시기를 놓쳤다. '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사고 즉시 큰 병원으로 후송해서 치료 하였더라면 어느 정도는 고칠 수 있었을 텐데 한 달간 하동병원에 방치했었기 때문에 치료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는 '제 주위에 스승이나 어른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큰 병원으로 후송해 팔을 치료 하라는 말을 해 주었더라면. . .' 하는 마음을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제 4 절 부산 오육군 병원의 생활 부산 영도다리 옆에 있는 오육군 병원에 8월 1일부터 입원한 후 썩은 부분을 수술로 잘라 내는 일을 수 차례 했습니다. 거듭되는 수술로 팔에 남아있는 살이 없어서 양쪽 허벅지 살을 떼어서 입히는 대 수술을 네 번이나 하였습니다. 그리고 팔을 'ㄱ' 자로 려어 긴 대못 2개로 박아 고정시켰습니다. 수술과 치료 때마다 밀려오는 아픔은 중학교 1학년 학생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이였습니다. 오 육군병원에서는 1964년 2월말까지 7개월 정도 지냈습니다. 병원 생활은 어린 저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사고 전에는 마음껏 달리고, 씨름하고, 철봉대에 매달려서 운동했는데 이제 왼쪽 팔을 잃었으니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비관하고 학대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비관적인 생각 때문에 병원 옥상에올라가 밑을 내려다보며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당시 오 육군병원에는 민간인으로는 저 혼자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군의관과 간호원 뿐 아니라, 군인 아저씨들은 저를 장애자라는 이름대신 '꼬마' 라 부르며 따뜻한 사랑과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지금도 금보다 더한 희망적인 격려의 말씀만 들려준 그 군인아저씨들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1964년 2월말에 오육군 병원을 퇴원하여 하동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사고는 저에게 왼팔을 잃어버린 2급 장애자라는(1999년 5월 28일판정)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절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저는 37년 동안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장애인의 혜택을 받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 모든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고 적은 혜택이라도 받기 위해 장애자 등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8개월 동안의 고통스러운 병원생활이었지만 사고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 5 절 영보 중학교에 복학 그 해 3월에 중학교 1학년에 복학하여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친구들은 2학년인데 저는 1학년이라서 속상했습니다. 건강했던 육신은 어디로 가고 한쪽 팔을 못 쓰는 장애자가 된 제 자신의 모습을 보니 매일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할수 있는 일이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겨울교복을 입을 때는 긴 팔이라서 괜찮았지만 여름교복을 입을 때는 매일 매일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었습니다. 남을 의식하여 팔이긴 흰 내의를 입은 다음 짧은 하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이런 저의 복장은 학교에서나 밖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저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혼자 학교를 뛰어 다녀야 했습니다. 체육시간에는 언제나 의자에 앉아서 운동하는 친구들을 바라만 보았습니다. '언제나 1년 전 같이 마음대로 뛰어다니고 운동도 하고 같이 행동할 수있을까?' 하고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영원히 불가능한 꿈이 되어버렸습니다. 군 트럭을 같이 탔던 '박상길' 은 사고 즉시 팔을 어깨부분까지 절단을 하였고 그 외 여러 친구들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박상길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끝내는 외롭고 괴로웠는지 술을 먹고 열차사고로 먼저 사망하였습니다. 김순길도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마산 통일산업에 다니며 성실하게 살았는데도 백혈병으로 먼저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순식이도 포크레인을 운전하다가 돌이 날아와 뇌진탕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제 주위의 여러 친구들이 결혼도 못 해보고 저의 곁을 떠났습니다. 저는 팔 때문에 자연적으로 왕따가 되기도 했지만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활동적인 학생으로 자라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 공부를해야 하는지,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목표가 없었습니다. 저의 장애 때문인지 주위에서 아무도 공부하라는 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공부의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저는 장애자가 공부를 해도 쓸 곳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누군가가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학업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저에게는 집안일 밖에 할 일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소 풀을 먹이고, 퇴비를 해오고 다시 학교 갈 준비를 하여 10리 길을 뛰어갔습니다. 수업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오후에도 소 풀을 먹이고 펄감도 하고, 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장암리 양조장이나 '방성지기' 주막집에서 술이 취하신 아버님을 밤늦게 집으로 모셔오는 것이 저의 일과였습니다. 아버님이 집에 오시면 술이 깰 때까지 온 가족의 이름을 불러댔습니다. 어머니는 논농사, 밭농사에 허리가 다 휘어질 정도로 일생동안 고생만 하였습니다. 아버님의 술 때문에 참다 못한 어머니가 집을 나가서 며칠을 오지 않아 온 동네사람들이 대방골 못에 가서 물을 빼고 어머니를 찾는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절에 있다가 3일 후에 돌아오셨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술 먹지 않는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 그 당시 저의 소원 이었습니다. 한 팔을 못쓰다 보니 나무를 하다가 왼쪽 손목을 낫으로 찍어서 피투성이가 된 때도 있었고 오른 손가락을 찍어서 뼈가 다 나을 정도로 잘라진 때도 있었으며, 겨울에 나무를 하다가 바지에 불이 붙어 무릎을 다 태워서 몇 달을 고생을·한 때도 있었습니다. 풀베기와 나무를 하도 많이 해서 허리에 큰 종기가 나서 치료를 하느라 2달 동안 고생을 한 때도 있었습니다. '정한봉' 에서 풀을 해 오다가 절벽으로 떨어져 죽을 고비도 넘겼으며 땔감 나무를 하다가 7m정도 높이의 나무에서 떨어진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비록 팔 장애를 가졌지만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리타작을 할 때면 보리이삭을 주우러 다녔고, 가을이면 나락이삭을 주우러 다녔습니다. 고구마를 캔 자리에 고구마 이삭을 캐러 다녔습니다. 겨울에는 산에서 나무를 해서 팔기도 했고 장작을 도로까지 날라주고 돈을 번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였지만 일에 미친 사람같이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저의 학창시절은 학교생활 보다는 가정 일에 더 열심이었습니다. 제 6절 보상금 15만원이 나의 왼팔이라니 저는 그 당시 군 트럭으로 인한 교통사고를 국가가 보상해 준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저의 어머니 아버지나 동네 친척들도 순박한 산골 사람들이라 알지 못하였습니다. 누구도 저의 한쪽 팔을 잃어버린 현실에 대한 피해보상과 저의 장래에 대한 계획과 대책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저의 한쪽 팔의 장애에 대한 피해보상 보다는 집안 일과 학교 다니는 일에만 매달려야 했습니다. 저는 어리지만 언제나 7남매를 키우기 위하여 밤낮 없이 논밭에서 일하시는 어머님을 도와 어머님의 손발이 되어 드리고자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통사고 브로커가 와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 보상금을 받아 주겠다고 하여 아버님과 형님은 소송을 맡겼습니다. 1966년에그 브로커가 다시 와서 처음에는 10만원을 주고 한 달 후에 와서 5만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상금이 얼마나 나왔는지는 일제 시대의 정신대 피해보상, 6 · 25 전쟁 보상, 월남전 고엽제 피해, 5·18피해도 3년이 지났지만 보상을하고 있습니다. 이 처참한 현실 앞에 왜 3년 시효가 지났다고 피해보상을 받을 수 없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수시로 팔이 아파서 진통제와 약을 사먹고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도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 고아원, 양로원, 장학재단을 설립하겠다는 것이 꿈이 었습니다. 제 7 절 고힝을 떠나 자활의 길로 저는 서울에 계신 큰 형님의 가구 공장에서 일을 하기로 하고 1968년 2월 21일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하동에서 서울까지 완행기차로 14시간이나 걸려 서울에 도착하엿습니다. 제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이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양보중학교 위에 있던 절의 주지승은 저에게 '학생은 세상에서 장사를 하면은 큰 부자가 되고, 도를 닦으면 큰 인물이 된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저는 악몽을 꾼 것 같은 지난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큰 부자가 되어 학교도 설립을 하고, 양로원도 운영하고, 고아원도 운영을 하고자 고향을 떠나 낮설은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돈을 벌어 이 사회를 위해 필요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형님의 가구 공장에서 1년을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도 형제지간이라 월급은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해 겨울 하동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두 번 째로 고향을 떠난 것은 1969년 2월 21일 입니다. 하동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우리나라 중앙 부분인 대전역에 내리자 밤이 되었습니다. 역 옆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시장구경을 하던 중 큰돈을 투자하지 않고도, 김장사와 미역장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수중에 돈 2만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연히 만난 사람이 빌려 달라고 하여 7천원을 빌려주고,남은 돈으로 방 값을 내고, 밥을 사 먹는 생활을 하다가 돈이 다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돈 50원으로 국수를 한 다발을 사면 15일 동안 먹을 수있었는데 그것마저 떨어져서 거지 신세가 되어 길에서 가게마다 다니며 빵을 구걸하여 먹고살았습니다. 할 수없이 저는 대전서 청주까지 걸어가며 막노동 일을 찾아 다녔습니다. 청주에서 2일 동안 돈이 없어서 굶다가 재산 목록 1호인 시계를 5백원에 팔았습니다. 청주서 버스를 타고 신탄진까지 와서 신탄진에서 버스비를 아끼려고 걸어서 대전까지 왔는데 헤매다가 보니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자취방에 돌아왔습니다. 또 다시 막일을 찾았지만 일이 없어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저의자존심과 체면도 배고픔 앞에서는 송두리째 무너져 갔습니다. 집주인에게 밀린 방세 때문에 온갖 욕을 얻어 먹었습니다 구걸하면서 젊은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이 없어서 얻어먹고 사느냐는 비난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돈 빌려 준 집을 찾게 되어 한달 만에 7천원을 받아 대전시장에서 미역과 김을 사서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미역과 김을 팔기 위해 금산장에도 가고, 공주 장에도 가고, 옥천 장에도 가고, 신탄진 장에도 돌아다니는 말그대로 장돌뱅이가 되어 5일장을 부지런히 쫓아 다녔습니다. 돈이 약간 모아지자 나이론 옷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옷을 고르는 척하다가 자꾸 훔쳐가서 할 수없이 옷장사를 정리 하였습니다. 저는 수도공사를 하는 공사장에서 땅 파는 일을 하다가 겨울에 다시 고향인 하동에 돌아가 가사일을 돌보며 산에서 땔감나무 해오는 생활을 하며 지냈습니다. 1970년 2월 21일 그 동안에 모아두었던 3만원을 가지고 완행열차를 타고 이 번에는 천안에 갔습니다. 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자고 그 이튿날 천안 방죽거리에 하숙집을 정하고 바로 그 날 서울 중부시장에 가서 김 1박스를 도매로 가져와서 천안, 온양, 진천, 안성, 병천, 오산, 평택 장으로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했습니다. 김 뿐만 아니라 북어도 팔고 미역도 팔며 기반을 닦아 갔습니다. 그리고 쌍용동에 살다가 성정동의 새 양옥집 전세방 한 칸을 얻어 이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매일매일 돈버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장사를 하고 저녁마다 집에 돌아와 돈보따리를 정리하여 돈을 세는 재미에 고달픔도 잊을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돈을 보내고 옷도 사서 부쳐 드렸습니다. 동생들의 책값과 용돈도 보내주었습니다. 매일 외롭고 고달픈 하루의 생활이었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꿈에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하루 하루 돈이 불어나는 재미에 희망을 갖고 열심히 장사를 하였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참으로 열심히 살며자립의 기반을 다져갔습니다.
제 2장 통일교 전단지 한장에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넌
저는 1970년 7월 31일. 5일장이 안 서는 날이라 마당 수돗가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있던 중, 키가 150cm정도 되는 아주 작고 배가 만삭인 정선자라는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전단지 한 장을 주면서 "밤에 우리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니 와서 들어보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객지생활에서 외로웠던 저는 그 전단지 한 장에 끌려 내 발로 걸어가 통일교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전단지를 주며 문선명의 통일교를 믿으라는 정선자 씨의 말 한마디가 결국 제 인생을 빼앗고 파멸시켜 버렷습니다. 제가발을 내디딘 천안 통일교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은 단촐한 분위기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가 40일 하계 전도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에는 통일교 부인들이 남편과 자녀를 떠나 전국 각 통일교에 배치되어 전도 활동을 합니다. 천안 통일교에도 처음에 몇 명이 나와 열심히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방학동안에는 부인 전도 대원들이 전도를 했지만 모두 자기 가정으로 돌아갔고 교구 본부인 천안교회는 교인들이 얼마 되지 않아 교회형편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1970년 11월 25일. 777쌍 합동 결혼식을 올린 부인 전도 대원들이 결혼 후에도 남편과 같이 살지않고 3년동안 전도를 하기 위해 천안교회에 전도대원으로 배치되어 왔습니다. 천안 통일교는 지원나온 전도대원들의 전도를 적극적으로 해서 조금씩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김민중 목사는 저에게 열정을 가지고 통일교 교리를 가르치면서 3년 후면 기독교가 통일교로 전부 흡수되고 불교, 유교 등 모든 종교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게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원리 강론인 창조 원리부터 채림론까지 들으면서 문선명이 틀림없이 재림주이며 참부모님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김목사는 3년 안에 종교 통일은 물론 정치, 경제, 언론, 문화까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고 순종하고 따르며 전체가 통일된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으면 3년 내에 지상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강의하였습니다. 부인 전도 대원들은 합동 결혼식을 하고도 제일 깨가 쏟아진다는 신혼 초인데도 남편과 살지 않고 문선명 교주를 위해 시간을 바쳐서 전도 활동을 하여 죽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 부모인 문선명에게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 왔다고 기쁜 보고를 드리기 위해 전도 활동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꽁보리밥과 김치만으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미역을 주면서 미 역국도 끓여 먹게 했습니다. 김민중 목사의 사모는 큰그릇에 빵을 가득 담아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구장 사모가 머리에 빵을 이고 집집마다 돌아 다니며 장사를 하는 것을 보니 통일교 목사의 길을 알 것 같았습니다.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구 본부의 총무 부장인 박무병씨는 호떡 장사를 하여 천안교회의 재정을 돕고 있었습니다. 결혼한 전도 대원들은 생활비를 조금씩 냈지만 교회운영비로서는 너무 부족했습니다. 저도 간간이 교회에 가서 꽁보리 밥과 시래기 국을 먹은 때도 있었습니다. 제 2 절 천안교회 청넌회 부회장 저는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운영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5일장을다니며 미역 장사, 김 장사, 건어물 장사를 하여돈 버는 재미에 빠져 있었습니다. 매일 자전거에 미 역과 김을 싣고 안성, 진천, 온양, 오산, 천안장에가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갈 때면 왼쪽 팔을 사용할 수 없어서 오르막을 올라갈 때는겨울에도 땀이 날 정도였습니다. 자전거에 짐을 싣고 갈 때 버스나 트럭이 인정사정 없이 저를 스쳐 지나가서 위험한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찬 바람에 자전거와 육중한 건어물 짐과 같이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는상처를 입을 때도 많았습니다. 힘 들었지만 건어물 장사를 할 때 좋은 장소를 잡았고 저의 열성 때문에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제가 장사가 잘되니까 주위 다른 장사들 중에 시기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에게 잘 대해주어서 대인관계도 좋았습니다. 천안 방죽거리에서 자취할 때 시장에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밤 9시경에 천안 시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저의 집까지 기독교 목사님 한분이 기진맥진 하여 찾아 왔습니다. 충남 서산에서 교회를 하다가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교회를 떠나 사모와 삼남매를 데리고 여인숙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3일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딱한 사정을 듣고 목사님을 자전거에 태우고 천안역 앞 여인숙에 가서 사모님과 자녀들을 데리고 가서 식사 대접을 하고 돈을 조금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떠날 때까지 적은 정성이지만 도움을 드렸습니다. 하루는 장사를 하고 막 돌아와 밥을 지으려고 하는데 멋진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맨 신사가 와서 배가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얼굴도 점잖고 잘생긴 분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분은 열차에서 옆에 앉은 사람이 음료수 한 병을 주어서 마셨더니 수면제를 탄 음료수인지 모르고 잠들게 되었고 일어나 보니 상위 양복과 지갑을 도둑 맞았다고 했습니다. 할 수없이 옥천에서 내려 천안까지 철길로만 걸어올라 왔다고 하였습니다. 집이 서울이기 때문에 먹을 것을 얻어먹고 영등포에 있는 집에까지 걸어서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분을 모시고 천안 시내까지 가서 식당에서 짜장면을 곱빼기로 사드리고 집에 들어 갈 때 과자와 과일을 얘들에게 사가라고 돈을 조금 드리고 서울행 버스표를사서 보내 드렸습니다. 며칠 후 주인 아주머니 말이 저에게 도움을 받은 분이 서울 올라가서 은혜를 갚기 위해 천안 자취 집에까지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저의 자취방은 도로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일이 많았습니다. 천안 성정동에 살 때는 우연히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는 화가를알게 되었는데 그 화가도 생활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몇 달 동안 쌀, 라면,반찬을 사다 드렸는데 그때마다 저의 어머니처럼 생각되어서 항상 많이 못사다 드리는 것아 가슴 아팠습니다. 저는 길에서 행려 병자가 쓰러져 있거나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얼마라도 도와주어야 마음이 가벼운 성격 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여자 분에게는 시장에 가서 옷을 사다 드리고 남자 분에게는 집에 있는 제 옷을 보따리에 싸 가지고 가서 드린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사이비 종교인 통일교에 발을 내 디딤이 영혼과 육신을 빼앗기고, 꿈도 청춘도 가정의 모든 것도 빼앗기는 순간인 것을 그땐 몰랐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깨닫고 보니 그것은 악몽의 만남, 죽음의 속삭임, 사단 마귀의 역사였습니다. 그 당시 통일교 교인보다 먼저 기독교 교인이 저의 귀에 통일교는 이단교회라 교육을 했더라면 제가 통일교에 입교하여 인생이 파멸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통일교가 이단교회라고 매일 한명에게라도 외친다면 저같이 어리석은 사람도 이단교회에 빠지는 일이 없이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리석게도 통일교가 사이비 종교라는 외침을 통일교 입교 전까지 단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입교 후에는 이미 통일원리로 세뇌 교육이 되어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재림주로 믿고 섬길 때라서 통일교가 이단교회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 귀에는 기독교 교인이 통일교 반대하는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저는 진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참 부모님으로 재림주님으로 믿고, 우상으로 섬기며, 교인들의 재산을 착취하는 데 앞장섰고, 문선명을 재림 주님으로 구세주, 참부모, 천지 부모로 증거하는 데 모든 청춘을 바쳤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의 자녀나 형제, 친척, 친구가 지금 사악한 유혹에 빠져 통일교에 입교한다면 저와 같이 파멸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통일교 전도를 막아주십시오. 세계에서 사이비 종교의 천국이 대한민국이라 합니다. 사이비 교주들이 아름다운 금수강산, 지상천국인 이 땅에서 기독교를 모태로 하여 우후죽순같이 생겨났습니다. 살인집단 백백교, 암살 자살집단오대양교, 동방교,전도관 등 약 150파가 넘는 사이비 교주들이 저마다 주님이라고 자칭하며 선량하고양심적인 국민들의 영혼을 빼앗아 영적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가정 파탄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모든 성도는 일치 단결하여 목숨을 걸고 통일교와 사이비 이단을뿌리 뽑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4에 "하나님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 이라" 고 말씀했듯이 하나로 단결만하면 문선명 이단궤멸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와 각 교회에서 저를 간증집회에 초청하여 통일교의 정체와 비리를 알리고 싶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내 이웃을 전도하지 않으면 문선명 통일교 집단에 영혼을 빼앗겨 지옥으로 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은 경각심을 갖어야 합니다. 각 지역마다 사이비 종교 박멸운동을 범 기독교 운동으로 활성화시켜 나간다면 이 땅에 다시는 저 같은 희생자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혼을 빼앗는 이단궤멸을 위해 싸워서 승리하라는 기독교 성도들에 대한 지상 명령 입니다. 제 3 절 새벽 기도 하던 중 영계에 가보고 나서.. 1971년 7월 21일. 집에서 새벽기도 중 잠시 입신했습니다. 저의 육신이 방바닥에 쓰러졌는데 "준철아, 준철아, 준철아!" 라며 3번을 부르는 음성이 들렸고 마지막에 제가 "네!" 하고 대답을 했을 때 영혼이 육신에서 이탈하여 공중에 서 있었습니다. 그 음성은 다시 나에게 "준철아, 이 도끼를 받아.!"라고 말할 때 하늘로부터 큰 쇠도끼가 나에게 날아왔고 엉겁결에 오른 손을 내밀어 그 큰 쇠도끼자루를 잡게 되었습니다. 다시 "준철아, 쇠도끼를 잡았느냐?" 라고 묻자 나는 "잡았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더니 "이 세상을 내려다보아. 바짝 마른 나무는 사이비 종교이며 사단 마귀이니 다 짤라 버려라. 푸른 나무는 살아있는 신앙자이니 살려두어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백발 노인이 되어 쇠도끼로 썩은 나무를 베었습니다. 제가 베기를 다하고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허리를 펴고 일어섰을 때 "준철아, 이제 떠나거라." 라는 큰 음성이 천둥 번개소리 같이 저의 귀에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터널이 나오면 그 터널을 통과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저는 그 명령에 따라 터널을 통과하였습니다. 제가 터널을 통과하니 저 세상 영계였습니다. 한참을 그 곳에서 서 있으니 바다 가운데 수중 다리가 있었고,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자가용 한 대가 제 앞으로 왔습니다. 그차에 있던 운전 기사는 천사였는데, 그 천사가 말하기를 "제가 이제부터 모시겠습니다. " 하고 자가용 뒷 자리의 문을 열어주어 저는 차를 타고 끝 없는 길을 달려갔습니다. 마침내 그 차는 바다를 지나 육지에 도달했고 아름다운 궁전 입구에 정지하였습니다. 그 운전기사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따뜻하고 겸손한 자세로 대해 주셨고, "이제 제가 할 책임은 끝났다" 고 말했습니다. 저를 보고 그 천사 운전기사는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l서도 궁전 입구에 있던 남자가 자가용 문을 열어주면서 저에게 "어서 오십시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 하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안내를 받아 호화 찬란한 궁전 제일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올라가 가장 아름다운 방으로 안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방에 들어갔을 때 강렬한 빛이 있어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저에게는 음성만 들려왔습니다 "준철아, 하나님을 믿겠느냐!! 천국과 지옥을 믿겠느냐." 하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곳에서 "이제 준철아 떠나거라" 라고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죽은 나무 사단 마귀를 다 잘라버리고 백발노인이 되어 죽어서 할 일을 다하고 저승에 왔습니다. "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이제부터 시작이야. 너에게 사명이 있어. 이 세상의 모든 사단 마귀와 죄악을 쇠도끼로 찍어 버려라." 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궁전을 내려와 수중다리를 통과하고 이승과 저승의 터널을 통과하여 내 집으로 들어왔는데 제 육신은 아직도 쓰러져 있었습니다. 영혼이 몸 속으로 들어가자 저는 의식에서 깨어났습니다. 저는 다시 살아난 후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제가 죽으면 끝이 아니고 영계의 시작이요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즉시 정 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끼를 받은 것은 목사의 사명을 받아 사단마귀를 찍어 없애라고 하나님이 저에게 명령한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통일교에 목사과정을 밟아 목사가 되었고 통일교 30년 신앙목사생활 중 생지옥같은 문선명 집단의 생활을 체험한 후 세뇌에서 깨어나 탈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며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단 사이비 교주인 문선명적그리스도를 궤멸하라고 저에게 도끼를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 이름으로 언론방송을 통하여 보도하고 각 교회에서 간증하는 일이 통일교회를 궤멸하는도끼받은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보도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문선명의 정체와 피가름 의식, 비리를 폭로하여 인류역사에 가장 큰 문선명 적그리스도를 뿌리 뽑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문선명은 1971년 1월 3일, 예수님 탄신일이라고 주장하며 통일교도인 처녀 장정순을 예수님과 결혼시켰습니다. 통일교 원리강의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제사장 사가랴와 마리아가 관계를 맺어 예수님이 탄생 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의 원리강의에는 '예수를 믿어도 완전구원을 받지 못하며, 실패한 예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이 참 부모요 재림주로서 이 땅에 탄생했기 때문에 예수가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은 1900년 음력 3월 1일을 참부모, 재림주로 섬기는 날로 정했습니다. 문선명의 생일인 1920년1월 6일을 재림주 탄신일로 정한 것을 통일교인들이 세뇌되어 모두 믿듯이 저도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목사가 강의하는 대로 모두 수긍하고 받아들이고 따랐습니다. 저는 3년 동안 모진비바람과 추위와 싸우면서 기반을 닦은 장사가 너무나 아까웠지만 물건을 팔고 다 정리하였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의 길이 제가 가야할 사명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제 4 절 통일교의 제 2차 기동대 활동 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목사 가정 인 제2차 기동대에서 6개월 동안 활동하기 위해 순전단 21일 교육에 들어갔습니다. 1972년 11월 21일.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수택리 중앙 수련소에 21일 원리 수련을 받았습니다. 창조원리부터 재림론까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재림주 참부모로 믿고 복종하며 증거하기 위한 세뇌교육 기간 이었습니다. 그 교육 후에 제2차 기동대 대원으로서 충북 순회 전도단 46명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기동단 단장은 임순도씨였습니다. 46명의 대원은 충북지역을 다니면서 6개월 동안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매일매일이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고 복종하며 통일교 발전을 위하여 충성을 맹약하는 고된 세뇌교육 훈련기간 이였습니다. 저는 훈련 기간 동안 무엇이든지 1등을 하고자 어떤 순전단 대원들보다도 더욱더 열심히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얼음 목욕도하고, 밤새도록 철야 기도도 하며, 산꼭대기 성지 기도회도 가졌습니다. 저는 특별 헌신대원으로서 전도를 하면서도 연필사업, 성미사업을 했습니다. 1960~1970년대의 통일교는 젊은 청년들과 학생들을 시켜 전국적으로 성미 구걸 사업과 연필사업, 떡 장사등을 하며 성금함을 들고 모금운동을 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나 추석, 설 명절 때도 모금 운동을 하였습니다. 저는 모금 운동에 자신 있게 활동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 가지 구실로 진행되는 통일교 모금활동에 동참하였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기 위하여 학자금 마련을 위해 헌신사업을 나왔다고 하며 집집마다 쌀과 돈을 달라고 하며 다녔습니다. 시골 동네를 다니면서 집집마다 쌀자루를 가지고 동정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순수하고 착한 시골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동정을 하여 100원, 500원, 1000원을 주었습니다. 연필 한 자루에 쌀을 한 되나 주시는 분도 있고 한 홉 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프면 찬밥이나 국수도 얻어 먹을 때가 많았고,고구마로 점심을 대신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쌀자루에 쌀을 모으면 나중에는 어깨에 둘러매고 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장거리를 갔다가 교회로 돌아 올 때면 밤 10시가 넘고 11시가 될 때도 있습니다. 교회에 도착하면 매일 녹초가 되었습니다. 모금 활동을 끝내고 밤늦게 돌아오면 결과 보고회, 원리강의 듣기, 기도회를 마치면 자정을 넘기기가 일수였습니다. 아무리 늦게 자도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정성스런 기도를 위해 냉수 마찰을 했습니다. 소변을 보면 그 자리에서 얼음이 어는 추운 겨울날에도 이런 일은 쉬지 않았습니다. 새벽 4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새벽기도를 하였습니다. 통일교는 각시 군 지역에 하나님이 임재하고 함께 하는 땅이라고 하는 '성지' 를 산꼭대기마다 정해 놓고 성지 기도라는 명목으로 새벽마다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헐벗고 굶주리며 매일매일 극기 훈련하는 심정 이었습니다. 이런 저의 노력으로 6개월의 순전단 졸업 때는 46명 가운데 1등을 했습니다 전도도 106명을 하여 우수상을 받고 개근상도 받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문선명을 믿는다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요, 최고의 은사요, 최고의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6개월 동안 저는 매일 꽁보리밥에 김치만 주어도 감사했고, 한끼는 국수만을 주었는데도 저는 참 부모님, 재림주님이라고 믿었던 문선명의 은혜로 알고 감사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것이 예배, 기도, 전도, 쌀 거두는 성미 모으기, 봉사, 심정교육 생활이었습니다. 저는 코피를 다 쏟으며 6개월 동안 극기훈련을 받음으로서 문선명 통일교의 말단 목사, 교회장 자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된 훈련으로 피골이 상접하여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결국 6개월의 수련 후 하동의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제가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첫 번째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의 사슬은 저를얽어 메기 시작했습니다. 1973년 5월 20일 수료 후 6월 1일날 임순도 단장으로부터 충북 보은군 적암교회로 발령을 했으니 임지로 빨리 와서 목회활동을 하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즉시 충북보은 적암교회로 갔습니다. 저는 통일 원리로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일교를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문선명의 교리에 세뇌되었기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 하였습니다. 통일교를 탈출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친 것이었습니다. 제 1절 기적은 일어나고 제가 충북 보은 적암교회에 취임식을 하고 부임했을 때 전임목사는 인수인계도 없이 가버리고 난 뒤였습니다. 저는 통일교 교인들 몇 분을 중심으로 전심전력을 다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4개월만에 교인을 70여명으로 늘렸습니다. 보리 벨 때는 보리를 베 주고, 모심을 때는 못줄도 잡아주고, 가을에는 대추도 따주고, 벼 벨 때는 일손을 도우며, 때에 따라서는 아기도 봐주며 무엇이든 봉사를 했습니다. 적암교회 목사로 취임한 후 매일 끼니때 마다 물을 끓여 밀가루 한 주먹을 집어넣고 간장도 없어 소금으로 간을 해서 먹었습니다. 어쩌다 라면이나 국수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적암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밥을 먹은 것은 한달 반 만인 1973년 7월 9일월요일이었습니다. 777가정인 유철재 부목사가 쌀 2되를 성미로 가져 온 것이었습니다. 쌀로 밥을 지어서 맨밥에 간장만 가지고 먹었지만 꿀맛이었습니다. 저는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그 후 교회 옆 땅을 개간하여 돌과 나무를 걷어내고 옥수수를 심어 옥수수 밭을 만들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서 점심, 저녁이나마 끼니로 때우려고 매일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해 길렀습니다. 옥수수 싹이 무릎까지 자라 올라 왔을 때였습니다. 심방 갔다가 오니까 동네 큰 암소와 새끼 송아지가교회에 들어와서 그 옥수수 싹을 잘라먹어 버린 것 이었습니다. 저는 매우 화가 나고 한편으로는 서러웠지만 그래도 남은 옥수수를 잘 길러 충북 청주 본부 교회와 보은 교회에도 한 자루 주었습니다. 그리고 적암교회 교인들과 옥수수 잔치를 벌렸습니다. 남은 것은 저의 아침 저녁 식사대용 양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적암교회 땅은 통일교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교회땅 120평을 매입하기로 작정하고 헌금을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이 3천원을 헌금하였고 나머지 돈은 제가 서울 중부시장에 미역과 김을 사다가 추석 때 각 시장에서 팔아 번 돈을 모았습니다. 또한 보은 속리산 산줄기 인 구봉산에 까지 올라가하루종일 칡덩굴을 잘라서 동네로 가져오면 한 관에 100원씩을 주었는데 매일 칡덩굴을 팔아 300원씩을 벌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대금을 지급하고 대지 120평을 매입 하였습니다. 적암 교회에서의 생활은 저에게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최악의 가난이었고 처절한 생활 이였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1인당 매월 50원을 내는 회비도 내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녁마다 강의를 할 때나 일요 예배, 수요 예배때 온 열정으로 설교를 하다보면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렸습니다. 저는 그래도 죽으면 살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전력을 다했습니다. 제 2절 성결교 신학교 저는 목회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신학에 대한 깊이와 교회 예배, 기도, 전도, 교회관리, 행정, 교육 등 모든 것을 제대로 교육받고자 성결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수님들은 문선명이 사이비교주며 통일교는 이단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통일교에 세뇌되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먼 달나라 말씀처럼 제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성결신학교에서 6개월 수업 후에 성결교 신학대학교 2학기에 편입했습니다. 당시 학교에는 김응조 학장님, 전영식 학감님, 성기호 교수님(지금의성결대학교 총장님), 조두만 목사님 등 많은 분들의 열정적인 가르침에 감동 받고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초조하고 불안한 나날이었습니다. 통일교는 이단이라 했기 때문에 같은 신학생들과 차도 같이 못타고 빨리 타거나 늦게 버스를 타고 4년 동안 다녔습니다. 성결교 교단에서는 저를 장로교회의 전도사로 알고 있었습니다. 전영식 학감님은 저에게 열정적으로 기도도 잘한다며 능력있는 부흥사가 되어 성결교 교단에서 목회 활동을 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갈 길이 있어 따를 수는 없었지만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성결교 신학교 신학생 시절에 하나님에게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재림 주인가, 적 그리스도인가 간절한 심정으로 100일 단판 기도라도 드려서 하나님께 문선명의 정체를 알려달라고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무지하고 몽매한 저는 문선명을 재림 주, 참 부모로 믿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 다. 그러나 지금 생각을 해보니 그 당시 단 한번이라도 통일교에 대해 교수님과 상담을 했더라면, 통일교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기도를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저를 붉은 적 그리스도인 문선명 통일교교주로부터 구원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 교주의 붉은 철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도 통곡하셨을 것입니다. 저도 지금에야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제 3절 문교주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가는 의식인 합동결혼식 1975년 1월 13일. 청파동 통일교구본부 교회에서 전국에서 많은 미혼남녀가 참석한 가운데 집회가 열렸습니다. 미혼남녀를 양쪽으로 두 패로 만들고 가운데 길로 자칭 재림주인 문선명이 왕복을 하면서 미혼남녀의 얼굴 관상을 봅니다. 조상 위로 7대, 아래로 후손 7대 관상을 보고 천 년을 내다보며 가정 천국과 행복한 가정을 꾸며 이혼이 없는 참가정 합동결혼식을 올릴 짝을 맞춘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이 "너, 너 이렇게 만나봐!" 라고 명령하면 미혼남녀는 옆의 만남의 장소에 가서 서로 만나보고 문선명 앞에 와서 경배하고 결혼할 것을 맹세하고 마지막에 약혼 축도식을 받습니다. 이 집회에 참석한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제가 신학 대학을 다니고 있고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하오니 저의 아내로 착한 사람으로 짝을 맞추어 주십시오." 라고 용감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문선명은 "그래? 내가 목사 사모로서 착한 색시감을 찾아 주겠다"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끝부분까지 미혼 여자들을 둘러보고 맨 마지막에 앉은 이영희씨를 저의 결혼할 대상으로 정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영희씨와 만나 대화를 해보고 결혼 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이영희씨에게 만나 나는 신학생이라는 것, 앞으로 목회자의 사명을 다할것, 교통사고로 팔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말했을 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축복 결흔식이 남편으로써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자녀들 앞에 아버지로써 역할을 다하지못하는 비극의 출발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1975년 2월 8일 서울 장충체육관에는 성대한 통일교 할동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저의 집이나 장인, 장모님 집에서는 통일교를 반대할뿐 아니라, 합동결혼식은 더욱 만류했었습니다. 그러나 장인, 장모님은 결혼식장인 장충체육관에 오셨습니다. 결혼식에서 문선명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 예수님도 축복을 받지 못하였는데 부족한 너희들이 축복을 받아 원죄, 혈통죄, 연대죄, 자범죄도 없는축복 가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통해 합동 결혼식을 올린 통일교 교인들 가정은 죄 없는 자녀가 탄생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개인천국과 가정천국을 이루어 천국 백성으로써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부는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통일교 규례에 따라 3년의 전도기간이 있기 때문에 서로 혜어져 살았습니다. 1975년 6월 7일 토요일, 구국세계대회를 위해 각 나라 60개국 대표가 입국했고 1백 20만명이 서울 여의도 광장에 모였습니다. 전국 통일교 교인들은 각 지역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여의도 광장으로 모여 극적으로 1백20만명 집회를 성공리에 잘 마쳤습니다. 통일교에서 최초 합동결혼식자(1961년 5월 15일, 36가정)을 박종구 총단장(지금은 고인이 됨)은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우지 못하면 전국의 목회자와 통일교 교인들은 한강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자." 고 강조하면서 "전국의 기독교 교회에서는 6월 7일에 집회를 못하도록 비가 오라고 금식철야 기도하며 정성을 모으고 있다. " 고 하였습니다. 그날 오전엔 비가 와서 매우 초조했으나 행사를 하는 오후에는 비가 그쳤습니다. 통일교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통일교에서는 하나님이 문선명 자칭 재림주 편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기독교를 떠났고, 통일교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지금 생각을 해보니 구국세계대회는 문선명이 자기 욕망과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행사였습니다. 그 당시 통일교 교인은 1만 명도 되지 않았지만 교세를 자랑하기 위해 1백20만명을 집결하게 한 집회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날 동원된 전국의 교인들의 피눈물이 섞인 헌금으로 승공연합 사람들과 노인들의 식사대접, 관광버스 제공 등 온갖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제 4 장 서울 강서 교구
제 1 절 교구본부교회 개척, 부흥, 교회건축 1975년 7월 1일 서울 시내 12곳에 통일교 협회 본부에서 12명의 목회자를 추천하여 파송했는데 저는 서울 강서구를 맡게 되었습니다. 교회 마련을 위해 강서구 전지역의 건물을 수소문하고 다녔습니다. 마침내 화곡본동 2층에 교회를 마련하여 9월 1일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협회에서 단 10원도 지원 없이 자비로 교회를 마련 하다보니 경제적인 어려움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감사했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은 없어도 사명감으로 충만하고 충과 효와 열을 다하겠다는 열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기필코 교회를 건축하여 크게 부흥하고 넘치는 제단을 만들 것이라고 다짐 하였습니다. 매일 문선명 사진을 걸어놓고 경배드리기, 문선명 교주에게 충성하는 서약인 나의맹세, 가정맹세, 성초기도, 조식금식, 전도, 봉사 생활로 일관 하였습니다. 개척교회이다 보니 교인들은 있어도 교회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저의 집과 논 600평을 판돈으로 어렵지만 교회를 이끌고 갔습니다. 신학교 등록금 마련, 교통비, 교회운영비, 교회건축 준비, 전도 등 여러가지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교회건축을 위한 30일, 60일, 120일 조식 금식기도를 했고, 전쟁을 하는 심정으로 피, 땀, 눈물로 정성을 쏟았습니다. 강서교회는 2층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교회 건축을 할 때까지 박현종 430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강서구철거민 동네인 신월동에 18만원짜리 방을 얻어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160명 재적과 120명 예배를 목표로 밤낮 없이 혼자서 1인 5역을하며 전도에 주력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여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였고 그 사람들을 통일교 교인으로 만들기에 몸부림을 쳤습니다. 개척 교회이다 보니 매일매일 목사가 직접 전도하러 다녀야 하고 심방해야 했습니다. 거의가 새로 전도된 교인이다 보니 헌금도 별로 모이지 않아신학 대학 등록금과 교통비와 생활비가 필요해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은 원리 강의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각 교회마다 흑판이 필요하였습니다. 저는 교회 운영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흑판은 물론, 자동 스탬프 도장, 책도 팔았습니다. 심지어는 콘크리트 쓰레기통 장사도 직접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기도를 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취침 때까지 매일 미친듯이 경배, 나의 맹세, 기도를 하며 살았습니다. 협회에서는 개척교회인데도 교회 전세금이나 교회 운영비, 생활비 등을 단10원도 지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인 5역을 해서라도 교회를 이끌고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6년 1월 1일 문선명은 '자녀로 인한 천국 실현' 이라는 표어를 통일교 교인들에게 내려주었습니다. 저는 강서교회 개척목사로서 한 해를출발하는 첫 시간을 얼마 되지 않은 교인들과 함께 철야 기도로 정성을 모았습니다. 당시 강서구 화곡동은 허허 벌판 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강서교구본부교회 건축을 최우선 목표로 세웠습니다. 문선명은 1975년 12월 31일 오후 8시 15분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통일교 목회자들과 교인에게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서 역사적인 통일교 현시점을 사수하라고 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은 역사적인 결실시대에 통일교 교인들이 죽음으로서 이 민족을 구하고 통일교 발전에 제물이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문선명의 시책에 따라 강서교회를 기필코 발전시키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저는 "강서교회 교회건축을 하여 자칭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님이 안식 할 수 있는 강서교회 제단을 만들 수 있게 축복해 주옵소서" 하고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매일 신들린 사람처럼 밥을 먹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매년 1월 3일은 2000여년 전 예수님이 탄생한 날이라고 하여 통일교 교회에서는 예수 탄생 예배를 드립니다. 그날도 저는 새벽 제단에서 예수님 탄생 기도회와 간단한 예배 정성을 모았습니다. 1976년 1월 5일 서울 용산 통일교에서 서울교구의 목사 전체 전진 대회가 있었습니다. 김 영휘 한국협회장과 회의를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강서교회당 건축을 해준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서울 시내에는 대 선배 목사들이 있었지만 거의 전월세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척목사로서 교회건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때부터 만사를 제쳐놓고 교회 건축 대지를 사기 위하여 강서구 전체를 돌아 다녔습니다. 부동산 소개소는 거의 다 다녔을 정도로 많이 알아 보았습니다. 교통 좋고 인구도 밀집된 장소 3곳을 정하여 협회에 가져 갔지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김수한 건설 대장이 통일교 A타입 교회의 교회는 산꼭대기에 건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 차례 산꼭대기는 안된다고 간절히 호소하였지만 욕만 얻어먹고 결국은 화곡동 고지대에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정하려던 교통 좋고 인구도 밀집된 대지와 산꼭대기 대지와는 가격 차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몇 천 원 차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김수한 건설대장 때문에 산꼭대기에 짓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지 125평의 총 금액은 5백62만5천원이었습니다. 대지 125평에 건평 42평의 예배당을 계획했습니다. 1976년 3월 3일 대지125평을 매입하고 교회 건축 설계를 준비하며 교회건축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강서교회 옆에 있던 영등포 통일교 정호영 목사에게 교회 건축을 하는 2달 동안 3명만 강서교회에 교회 건축 인부들 식사 준비, 물 길러 오는 것 등을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관할 교회의 건축인데도 거절 하였습니다. 통일교가 천국을 외치며 3년 내에 통일교와 기독교의 통일이 이루어 진다고 하고 문선명이 만 인류에게 재림주로 추앙을 받는다고 하였지만, '사랑과 식구' 라는 말이 허구에 불과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희생,봉사, 탕감 제물이라는 말도 입으로만 외치고 실천하지 못하는 죽은 신앙이라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 교인들이 서로 부를 때 '식구님' 이라고 합니다. 적든 많든 한 솥 밥을 먹는 가족처럼 사랑과 희생을 나누자는 뜻에서 식구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이처럼 원리나 사랑을 외치지만 제가 통일교에서 경험한 것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함과 냉정함 뿐이었습니다. 교회당 건축일은 우리 강서교회의 몫이었습니다. 교회 부인 몇이 아이들을 업고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점심 식사 준비를 하였습니다. 저도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하였습니다. 벽돌도 나르고, 나무 판자도 자르고,시멘트 일, 페인트칠, 자재 운반, 200m 아래에서 물을 길어 오는 일 둥을 하였습니다. 건축하는 동안 저는 예배와 심방 외에 건축일로 재단과 협회에 뛰어 다니며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 하였습니다. 너무 일이 많고 힘들어 1인 10역을 해도 모자랐습니다. 오진수씨는 강서교구 본부 교회 건축을 위하여 고향 함안에서 강서교회로 와 무보수로 교회 건축 일을 도와줬습니다. 서정수씨도 봉사활동을 너무 많이 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착하고 진실한 청년들 이였습니다. 드디어 강서교회가 완공되자 그간의 많은 시련과 고통, 배고픔, 외로움, 기쁨 등 만감이 교차 하였습니다. 그 순간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대지 125평 가격이 560만원 정도였지만 지금은 100배가 넘는 5억 정도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육신을 벗고 영계에 갈 때까지 강서교회에서 목회하여 점점 더 큰 대형 교회로 성장시킬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강서교회를 건축하던 중 여러 가지 일이 많았습니다. 철물점에 가서 못을 사려고 쌀 배달을 온 쌀가게 아저씨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급경사 길을 내려가는데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아 순간적으로 도로 옆 시멘트 벽으로 자전거 핸들을 꺽었습니다. 저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벽에 부딪히면서 오른쪽 무릎 위에 뼈가 보일 정도로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제가 쓰러지는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자전거 주인은 브레이크가 고장났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생명을 구한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뼈 속까지 심을 박아서 썩지 않게 하고 새 살이 차 오를 때까지 두 달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붕대로 다리를 싸매고 전과 다름없이 건축 일을 하였습니다. 건축하는 동안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배웠습니다. 벽돌쌓기 시멘트일, 미장일 등 전문 기술자와 비슷하게 일을 많이 했습니다. 피와 땀, 눈물로 사력을 다한 서울의 강서교회 건축은 1976년 6월 10일 성공적으로 완공 하였습니다. 통일교 역사가 21년이 지났지만 당시 서울시내 영구교회는 몇 개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전세, 월세 교회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제일 후배 목회자로써 개척 1년 만에 교회 건축을 완공하게 되어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강서교회에서 1인 10역을 하며 새로 전도된 80여명을 교육시키고 교회를 교인들로 넘치게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1962-1963년대 선배 목사들 5명이 서울로 발령 받아 지방에서 올라와 강제로 강서교회를 빼앗았습니다. 본부에서는 강서교회를 저에게 빼앗아 이영진 목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철거민 달동네인 노원교구본부 상계동 개척 교회를 시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교회 건축을 했던 강서교구 본부에서 헌당 예배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눈물을 머금고 노원교구본부 개척 교회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임 이영진 목사는 목회 활동은 하지 않고 버스토큰 가게나 하고 신문 판매를 하였습니다. 저는 박탈감과 충격으로 한동안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은 회의 때 "재주는 곰이 넘고 덕은 엉뚱한 사람이 받는다" 며 저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때 통일교를 탈출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당시 문선명 통일교를 떠나면 죽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나 식구들은 한 두 번 충격을 받고 상처를 받으면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버리고 통일 교회를 탈출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는 외골수여서 그때는 문선명을 떠나면 천국을 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문선명 통일교를 버리고 미련을 끊으라고 꿈으로 경고하며 감옥에서 탈출하라고 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왜 문선명 통일 교회에 미련을 버리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저는 바보였습니다. 세번째로 통일교를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포기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제 5장 노원교구 본부 개척교회 제 1차 건축
제 1절 그래도 끈질긴 층성 1976년 8월 10일 노원 상계 교회로 부임하였습니다. 앞서서 여러 선배 목회자가 상계동에 교회를 세우려고 왔었지만 너무나 최악의 조건이라 다 실패하고 방 한 칸도 마련하지 못한 채 그만 두었던 곳이었습니다. 저는 작은방에서 상을 강대상으로 삼고 몇 사람과 노원교회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비록 강서교회 일로 마음은 아팠지만 목숨을 다해 몸부림치며 교회발전에 주력했습니다. 김 영휘 한국협회장도 부당한 인사이동에 마음이 아팠는지 상계동 비포장도로의 먼지를 뒤집어쓰시고 직접 찾아 와서 제게 1만 5천원을 주어 쌀과연탄을 샀습니다. 저는 교인을 전도하기 위해 미혼 남녀들을 취직 시켜 주었습니다. 합동 결혼식을 한 사람이라도 실직자는 취직을 시켰습니다. 첫 번째 노원교회 개척을 했던 상계 3동 95-75호 교회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장민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렵고 힘든 가정적 어려움을 해결 해주고 통일그룹인 일화제약에 취직 시켜 주었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라고 취직 시켜 주었는데, 처음에는 나왔지만 나중에는 잘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인은 50분의 1도 되지 않는 1200원을 월정 헌금으로 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회사에서 퇴근 후 교회에 와서는 저의 멱살을잡고 뺨을 때렸습니다. 제가 노원교회 장년 회장인 성영낙 씨에게 '장민수씨가(777쌍 합동결혼식자) 일화제약 내의 이순주(1800 가정) 부인과 연애를 한다' 고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일화제약에서 일어난 일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또 성영낙 씨에게 그런 말을 한 일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연애 헛소문의 진상을 알고자 성 영낙 씨에게 다그치니까 자기 교회 목사인 저에게 누명을 씌웠던 것입니다. 장민수 씨는 자초지정을 알아 보지도 않고 갑작스럽게 교회에 들어와서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고 폭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잘 살게 해주고 취직까지 시켜 주고 살려 주었더니 누명을 씌우고 폭행까지 하다니 웬 일이란 말입니까? 저는 꿈에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살면서 먼저 원인제공을 하여 싸움하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언제나 원인제공을 하여 문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통일교가 천국인줄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 목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제 전부를 바쳐 교인들을 사랑한 결과 돌아온 것은 누명과 폭행과 상처 뿐 이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저는 통일교 문선명을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며 교인들을 사랑한 것 밖에 없습니다. 제 2 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길 1972년 11월 21일부터 2000년 8월까지 통일교 목사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가난은 나의 친구였습니다. 제가 통일교 목회를 하기 전에 장사해서 모은 돈은 작은 집과 땅을 살 정도였습니다. 그 돈을 형님에게 맡겼는데 형님은 제가 사이비종교 목사라고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형님은 가구공장을 했는데, 가서 돈을 달라고 하면 나무 막대기로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폭행했습니다. 저는 이단 교회 거지 목사라고 온갖 핍박을 받아도 문선명 참 부모님을 믿고 견뎟습니다 결혼 반지, 시계는 전당포에 팔아서 교회 생활비로 쓰고 돈이 될 수 있는 책은 중고 서점에 팔아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1975년 12월 23일엔 형님에게 돈을 받으려고 밤 10시까지 형님을 기다리다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날은 발목까지 찰 정도로 눈이 많이 왔습니다. 그때 학생 차비는 25원이었는데 저는 15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타지 못하고 마포에서 강서교회 옆에 있는 신월동 월세방까지 걸어와야 했습니다. 오는 도중 눈길에 몇 번이고 넘어져 옷이 얼음 덩어리가 되어 도착하였습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통행금지를 넘긴 새벽 1시에 집에 도착하여 추위에 떨며 방에 들어갔습니다. 연탄불이라도 꺼지지 않았더라면 몸을 녹일 수 있었을 것인데 연탄불은꺼져 있었습니다. 집주인이 구들도 없이 연탄 아궁이만 만들어 저를 속이고 세를 놓았던 것입니다. 구들도 놓지 않고 시멘트만 바르고 도배만 하여 방을 만들었기 때문에 벽에는 고드름이 얼어 있었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추위와 배고픔,고난의 날이었습니다. 노원 교구 본부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도 가난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노원교회는 헌금도 없고 몇 명을 가지고 개척 교회를 하였기 때문에 신혼초인 저의 아내 이영희씨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으로 이를 악물어야 했습니다. 끼니를 거르는 비참한 노원교회 생활에 절약을 생명으로 알고 알뜰하게 생활 하였습니다. 아내는 상계동 도깨비 시장에서 버린 배추 잎을 주어다가 김치를 담았습니다. 어쩌다 계란을 사게 되도 깨진 것을 모아 파는 것을 사다 먹었습니다. 쌀도 7~8년 된 정부미로 속은 벌레가 다 파먹고 껍질만 있는 쌀을 헐값에 사다 먹었습니다. 밥을 하면 밥이 죽이 되어버 리고 입에 들어가면 씹은 것도 없이 녹아버렸습니다. 어쩌다 밥이 남으면 점심에 먹을때는 밥이 죽이 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매일 국수, 라면, 밀가루 수제비를 점심이나 저녁으로 먹었습니다. 저의 자녀들은 먹는 것에 너무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상계교회에서 서대문 행촌동에 있던 신학교까지 토큰 2개만가지고 다녔습니다. 토큰이 없어서 몇 시간이나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상계동 교회까지 온 때도 있었습니다. 양가 부모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기 때문에 양가 부모 형제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협회, 교구에서는 목회자가 아무리 생활이 궁핍해도 단 10원도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서울 교구 내에서 저와 같이 12명의 목사들이 개척을 시작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다 그만두고 3~4명만 어려운 목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1978년 2월 23일 성결교 신학교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교인들,부모, 형제들에게 졸업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인만 졸업식에 왔습니다. 그러나 겨우 차비만 있었기 때문에 꽃다발 살돈이 없었습니다. 제게 비상금 5천원이 있어서 아내에게 5천원을 주어 꽃을 사오도록 했습니다. 카메라도 없어서 동료에게 찍어 달라고 하여 한 장을 찍었습니다. 후에 편지로 사진 한장 받은 것이 유일한 졸업식 사진입니다 이제는 그 한장 마저 액자 속에서 곰팡이가 피어 하얗게 되었습니다.
제 3절 제 1차 노원 교회 교회 대지 매입 건축 1976년 12월 13일 상계3동 95-75호에 대지 20평을 매입하고 교회를 재건축 하였습니다. 1977년 3월 3일 중소기업 은행과의 잘못된 계약에 이의를 제기하여 재판에 승소해서 교회를 영구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교인들 이사짐을 옮겨주고 취업알선, 속옷 빨래 등 온갖 일을 하면서 교회를 위해 목사가 아닌 머슴으로 살았습니다. 진심으로 교인 한 사람 한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 20평 교회가 가득 차고 넘쳤습니다. 지방 중소도시나 산골에서 통일교를 개척, 부흥시키려 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도 최악조건인 강서교구본부와 노원교구본부를 개척, 부흥을 시킨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승리였습니다. 지방 중소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교회 건축을 하였더라면 선배 목사들에게 교회를 빼앗기지 않고 한국 최고의 통일교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제가 서울 최악의 허허벌판에서 개척하여 교회를 부흥발전을 시키면 선배들에게 교회를 빼앗긴 것은, 교회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바람 잘 날 없는 시련과 처절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통일교 대 선배 목사들을 제치고 크고 좋은 환경의 교회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와 같이 목회를 시작했던 서울시내 교회 12곳이 다 폐쇄되고 3곳만 남은 것은 개척교회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를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제 6장 새생명의 결실인 3남매 제 1절 첫 딸 '박은주' 1978년 1월 IS일 주일 오후 1시 26분에 첫 딸 은주가 태어랐습니다. 태몽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 장군이 바로 네 아들이다. " 라고 들었기 때문에 저는 은주가 태어날 때까지도 아들인줄 알았습니다. 교인, 이웃집 사람들도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1월 14일부터 하루종일 진통을 하고 14일 밤에는 밤새도록 진통을 하였지만 아기를 낳을 수가 없었습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사단 세계 사람이 아기를 보면 안 된다고, 성별 된 참 부모님의 아들딸은 자연분만 해야 한다고 교육했기 때문에 집에서 아기를 받으려고 했으나 불가능 했습니다. 1월 15일 새벽 상계 3동 도깨비 시장에 있는 40년 된 조산원으로 산모를 데리고 갔습니다. 산모는 기진맥진을 하였습니다. 오전 11시까지 진통을 했지만 아기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교회로 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산모에게 가려고 했으나 새 신자가 그 날 따라 두 사람이나 와서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낮 12시 40분까지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조산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까지도 아기를 낳지 못하고 '조산원' 원장과 산모가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습니다. 원장님은 40년 동안 아기를 받았어도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병원으로 빨리 후송하지 않으면 산모나 아기가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산모는 기진맥진하여 의식이 희미한 상태고 양수도 밖으로 다 빠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저는 7초대에 성초를 켜놓고 성령 하나님께 산모와 아기를 살려달라고 통곡하며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4Kg이나 나가는 아기가 나왔습니다. 산모와 아기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진실하게 하나님을 안믿었지만 믿었고, 제 마음속에는 통일교 목사를 하고 문선명에게 세뇌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잘 길러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것을 다짐했습니다. 1980년 10월 5일 오후2시에 두 돌이 된 은주를 잃어버렸습니다. 파출소에 신고도 하고, 동사무소에 가서 박은주를 찾는다는 안내방송도 수 차례 하였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상계동 전체를 오후2시~저녁 7시까지 울면서 찾아다녔습니다. 은주 엄마와 교인들 몇 사람도 찾아 나섰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은주는 항상 밥만 먹으면 교회 밖으로 나갔고 겁이 없었습니다. 아무데나 아장아장 잘 걸어 다녔습니다. 은주는 아기 때부터 용감하고 겁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날도 교회를 벗어나 여러 군데를 아장아장 걸어 다니다가 혼자서 새마을시장 구경을 하였나 봅니다. 제가 은주를 찾았을 때는 시장 도로변 독립문 메리야스 가게 진열대 앞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녁 7시여서 제법 어두울 때였습니다. 저는 은주를 찾은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은주 엄마나 교인들도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파출소나 동사무소에서도 다행이라고 하였습니다 찾지 못하면 고아원으로 갈 뻔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미쳐 있었기에 문선명씨에게 충성하는 구구 절절의 심정을 직접 웅변원고로 써서 은주에게 주었습니다 은주에게 웅변연습을 시켜 통일교 전국 웅변대회에 나갔습니다. 은주는 1985년 2월25일 참부모님 탄신기념 제26차 전국교구 대항 웅변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고 1987년 2월 3일 국민학생부 자칭 재림주 문선명 부모님 탄신기념 제28차 전국교구 대항 웅변대회에서도 1등을 하였습니다. 은주는 초등 학교 때부터 각종 상을 수없이 많이 받았습니다. 용감하고 인정이 많으며 자상합니다. 은주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용돈, 세배든 등을 알뜰하게 모아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생활이 어려워 그 돈을 다 썼습니다. 은주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얼마 되지도 않는 용돈을 모아 양복 한 벌을 사주었습니다. 제가 입을 옷이 없을 때마다 은주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지금까지 양복을 5벌이나 사주었습니다. 은주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저의 아내에게도 제가 못해 주는 옷을 해주고 반지도 해주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질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고기를 사오고 약을 사왔습니다. 은주는 밥값을 아끼려고 밥을 굶고 다닐 정도로 자신에게는 알뜰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들, 후배들에게는 어렵게 모은 돈으로 얼마나 많이 베풀고 사는지 모릅니다. 마음씨 곱고 항상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해주는 은주는 우리 집의 효녀 입니다. 제 2 절 아들 '박영진' 1979년 5월 12일 오후 1시 29분에 둘째 영진이가 첫 딸이 태어났던 곳에서 진통도 전혀 없이 순산으로 태어났습니다. 영진이가 태어날 무렵 통일교에서 5,000만 달러(한화 400억 정도)를 들여서 '오인천' 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시내 목사들과 교인들은 총 동원되어 엑스트라를 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저도 맥아더 장군과 작전회의를 하는 삼성장군으로 출연하고 이북의 포로로 교회에서 끌려 나오는 역할도 했습니다. 영진이가 태어나는 날에도 영화촬영을 하고 교회로 돌아오는데 벌써 아들 영진이를 낳은 것이었습니다. 이후, 영진이는 황달, 부스럼, 탈장 수술등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영진이가 첫 돌이 지나 걸음마를 할 때 아내와 장모님 생신으로 처갓집에 갔었습니다. 1980년 5월 저 혼자 잠을 자는데 새벽 1시경 하나님의 음성이 저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준철아! 너의 아들을 빨리 찾아라..." 꿈에 시체를 넣는 관을 보여주는데 시체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꿈에서 깨어나 밤새도록 우리 가정에 우환과 환란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침 일찍 울산에 있는 영진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영진이가 아무 탈이 없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새벽에 영진이가 일찍 일어나 아장아장 걸어서 마루를 나와 부엌을 내려다보다가 새빨간 연탄 아궁이에 거꾸로 머리가 처박혔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부엌에 있던 영진이 엄마가 놀라서 다리와 목을 잡고 영진이를 버쩍 거꾸로 들어 올렸다고 했습니다. I~2초도 안 되는 찰라에 영진이 목숨을 구했습니다. 영진이 엄마가 마당이나 방에 있었더라면 영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얼굴 전체가 화상을 입어 차마 볼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영진이는 이마에 물집만 잡히고 머리만 조금 태웠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음의 자리에서 영진이의 생명을 구해주셨습니다. 영진이는 어릴 때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영진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매년 반장,부반장을 했고 우등상도 받았습니다. 중학교 때는 전교 3등으로 장학금을 받아 저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저는 가족들과 노원교구 교인들과 같이 매일 오인천 영화에 출연을 했습니다. 북한군인이 6·25때 소련제 탱크를 몰고 3·8선을 넘어와 우리 가족이 사는 초가집을 송두리째 탱크로 밀어버리는 장면에서 마당에 있던 영진이가 놀라서 울고 아내는 빨래를 너는 역을 하였습니다. 단역 이였지만 그 때는 사명감에 불타 올랐고 감사하는 마음 뿐이였습니다. 그러나 400억을 투자한 오인천 영화는 한국에선 개봉도 못했고 미국에서만 일부 상영이 되었습니다. 400억이면 서울시내 각 동에 1억짜리 빌딩400개를 살 수 있는 돈이었는데 빌딩을 샀으면 지금은 수 천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선명 주위에 있는 충성꾼들이 끊임없이 일을 저질러 교인들의 피눈물을 짜고 파멸시켜 갔습니다. 통일교에서 추진했던 중국 판다 프로젝트는 항공, 자동차, 공업단지, 도시 등을 만드는 공사도 추진했지만 모두 실패를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4억 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알지만 공사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중간에서 사기 당하고 말았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피눈물 어린 통일교 교인들의 헌금을 사기 쳐서 교인들의 영혼과 육신을 죽이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엄청난 실패와 낭비를 하면서도 그 책임을 통일교 교인들에게 전가시켜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제 3 절 막내 '박은영' 1981년 4월 8일 새벽 5시 15분에 둘째 딸 은영이가 태어났습니다. 3남매가 매년 태어나다 보니 아내는 종일 3남매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의식주를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한 무능한 남편인 저는 아내에게 고통만 안겨 주어 미안한마음뿐이었습니다. 아내는 하루종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예배, 전도,심방을할뿐 아니라 가난한 살림을 불평 한마디 없이 잘 극복해 나갔습니다. 저는 노원 상계 교회의 발전을 위해 밤낮 없이 뛰어다녔기 때문에 아내는3남매를 키우느라 저녁에는 녹초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녁부터 새벽 기도까지는 제가 교회에서 어린 3남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기저귀도 빨고,가사 일도 도왔습니다. 연탄불 가는 것은 기본 이었습니다. 그러나 혹독한 고생과 처절한 가난으로 남편과 아버지로써 역할을 다하지 못해 한없이 가슴 아파 했던 날들이었습니다. 은영이는 언제나 언니가 입던 옷을 받아 입었습니다. 영진이가 입던 옷을 은영이가 입었을 때는 벌써 옷이 헤어질 정도로 낡아 버렸지만 은영이는 불평 없이 입었습니다. 1987년 2월 21일 우리 부부가 심방간 사이에 도둑이 교회에 들어와 18만원을 주고 산 카메라와 10만원을 주고 산 카세트를 훔쳐갔습니다. 은주와 영진이는 학교에 가고, 사택에는 7살인 은영이 혼자만 있었습니다. 도둑은 보자기에 물건을 다 싸 가지고 밖으로 나가다가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대형 액자 사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저의 부부가 심방을 갈 때마다 경배하고 기도하며 돌아와서도 경배하며 잘 다녀왔다고 보고하는 문선명 교주의 대형 액자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은 문선명 교주의 대형 액자를 집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경배하며 기도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하나님의 대적이며 자칭 신이 되어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자기에게 경배하고 기도를 하도록 시키고 있었습니다. 도둑이 문선명 통일교 교주 사진 액자를 떼려고 하자 은영이는 어린 나이인데도 도둑을 발로 걷어찼던 것입니다. 도둑은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그 자리에서 벌렁 넘어졌습니다. 도둑이 일어나 "아! 이 새끼" 하면서 온영이의 목을 졸랐습니다 은영이는 고함을 질렀습니다. 교회 라에서 떡볶이 장사를 하는 할머니가 고함 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왔습니다. 떡볶이 할머니가 도둑을 보고 "너 뭐야! 아기 목을 왜 졸라?" 하면서 도둑을 때리자 할머니를 확 밀치면서 쓰러뜨리고는 카메라와 카세트, 라디오를 가지고 도망갔습니다. 추운 겨울이라 두꺼운 목 폴라를 입고 있던 은영이의 목에 깍란 멍과 상처만 조금 나고 무사했습니다. 은영이는 착하게 자라나 걱정, 근심을 끼치지 않고 효도를 잘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반장도 하고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각종 상도 여러 차례 받아서 저희 부부를 기쁘게 했습니다. 처절하게 가난했지만 3남매를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자녀로 기르고자 노력했고, 가난하지만 생활비를 쪼개며 자녀 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7 장 서울 노원 교구본부 제 1 절 2차 교회 대지 매입 재건축 성공 상계교회는 날로 발전하여 교회에서 모든 교인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가득찼습니다. '김영휘' 한국 협회장도 노원교회에 와 보고 자랑스러워 하며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1978년에 전도 우수 한국협회장상을 받았습니다. 1979년 6월 1일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 코너에 40평을 매입하고 교회재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현 교회 매도 대금과 협회 재단의 지원금으로 한 것입니다. 재건축을 할 때도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하수도 공사, 수도공사, 시멘트 일, 보일러 설치하는 일 등 열 손가락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마침내 제 2차 교회 재건축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제일 후배 가정으로써 서울서만 3번째 교회 건축을 한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의 정성도 있었지만 사랑, 진실,은혜를 져 버려서 가슴에 못을 박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통일교인들의 신앙적인 배반으로 저는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물질적으로 노원교회 교인을 도와 주었다가 어려움을 겪은 때도 있습니다. 저는 박상수 집사에게 1979년 7월에 50만원을 빌려주었습니다. 그 당시돈 50만원은 상계 전철역앞 무허가 건물 4평 짜리 2채 값이었습니다. 은행 금리정도 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3개월 후 계를 타면 받기로 했습니다. 1개월치 이자를 받고 그 집에 심방을 갔는데 사람이 많이 몰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박집사 부인인 이희선 집사에게 내 돈 내놓으라고 하면서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싸움을 말린 후 박 집사 부인에게 사정을 물어보았습니다. 박상수 집사는 보증금 5만원도 안되는 산꼭대기 집에서 월세 8천원을 내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렵게 살지만 신용을 잘 지킨다고 하여 주위 사람들은 1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 철저히 신용을 지키면서 비싼 이자를 주기로 하고, 돈을 빌려서 그 돈으로 생활하고 이자를 주며 천 만원이 될 때까지 끌고 왔는데 마지막에 돈을 빌릴 데가 없어 저에게 돈을 빌렸던 것입니다. 저는 박집사 내외에게 그 동안 이자를 원금보다 많이 주었으므로 원금만 갚는 조건으로 하고 장기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박상수 집사에게 빌려 준 돈이 옆집 아주머니에게 빌린 것이었습니다. 저의 돈으로 이자를 매달 주다가 나중에 그 돈을 마련하여 갚았습니다. 박집사는 지방에 가서 집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이희선 집사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네 자녀들과 같이 끼니를 거르면서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형편이 되면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박집사 자녀들은 너무나 착했습니다. 부모의 잘못으로 자녀들이 고통 당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심방할 때 라면 1박스와 과자를 사다 주었습니다. 돈이 될 땐 쌀도 사다 주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지라고 항상 격려해 주었습니다. 박집사는 3년 후 저에게 20만원을 주었습니다. 나머지 30만원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박집사가 어디에 살던지 자녀들과 같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교역자와 교인은 절대 금전거래를 하면 시험이 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잠언 6:6) 어처구니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한 때도 있습니다 1960년대 말에 잠시 통일교에 나왔던 김태수씨와 저는 인연을 맺어 노원교회로 다시 나오게 하였습니다. 저는 김태수 씨를 전도하여 교회에 나오게 하기까지 온갖 정성을 들였고 아버지와 형님같이 모셨습니다. 어느 날, 제가 심방 전도를 간 사이에 김태수 씨가 교회에 와서 저의 아내에게 아줌마라며 교회 그만 두고 장사나 해서 먹고 살라고 빈정 거렸습니다. 저의 아내는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인내하며 비록 김태수 씨가 헌금을 하지 못했지만 깍듯이 어른으로 대접하며 모셨습니다. 목사인 제가 얼마나 비참하게 보이고 저의 아내가 불쌍히 보였으면 막말을 하고 장사나 하라고 하면서 무시했겠습니까? 심방 전도에서 돌아온 저는 모욕적인 말을 하고 갔다는 것을 듣고 김태수씨 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김태수 씨에게 동생 같고 자식 같은 목사와 사모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지는 못하고 사모를 아줌마라고 하고 장사나 해먹고 살라는 등의 그런 모욕적인 막말을 했느냐고 했습니다. 성질 급한 김태수 씨는 교만에 빠져 안하무인격으로 "뭐! 이 새끼? 어린놈이" 하면서 저의 뺨을 세차게 때렸습니다. 저는 아버지 같은 사람과 싸울수가 없어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있으면싸움이 될 것 같아 저는 그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철거민 달동네이고 마음이 강팍한 사람들이 많은 상계 지역이라 할 지라도 저는 죽도록 교인들을 섬기고 사랑으로 축복하며 정을 베푼 죄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로 마음이 강팍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나이 어린 목사이지만 2차례나 억울한 폭행을 당하다 보니 통일교가 천국이라고들 하는데 제겐 지옥 이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교인들이 영혼을 구원받고 달라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에 들어와서도 세상에 있을 때의 죄 많은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악행만 하였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은 참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수치와 폭행을 당하고 뺨이나 맞는 역할을 하기 위해 통일교에 입교하여 목사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목숨을 걸고 사명감을 갖고 목회를 한 것이었습니다. 억울해서 눈물이 비오듯 흘러 내렸습니다. 그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부족하고 나이가 어려서 무시당하고 뺨을 맞았다고 생각하며 저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통일교에서 선배 목사가 되고 나이가 많은 목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배반하고 은혜를 져버리는 통일교 교인을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노원교구 본부 제단에서 귀신 들린 자가 저의 기도로 악귀가 몰러가고 폐병 말기 환자가 역사로 완재되고 아들딸 못 낳는 사람이 기적적으로 자녀를 낳았습니다. 신유의 역사는 노원교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980년 국회의원 선거 때는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에 저의 교회가 건축을 완료할 때였습니다. 국회의원 후보 한 사람이 저를 잘 아는 분과 같이 밤 10시에 교회로 찾아와 돈 봉투를 내밀면서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30분 동안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도와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국회의원 후보는 도봉구와 노원구 관내에서 유일하게 돈을 받지 않은 목사는 박준철 목사라고 하였습니다. 몇 십만원이면 저에게는 거금 이였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생을 그렇게 고지식하고 정직하게 살아왔습니다. 국제 승공연합 강연회 때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행사 때 나오는 행사비를 행사 참석자 식사대접과 수건, 볼펜 등의 선물비용으로 다 사용하였습니다. 그러자 저를 관할하는 이상수 도봉구 목사는 저에게 그 돈을 왜 다 쓰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저보다 사례비를 4배나 많이 받았던 이상수 목사는 행사비를 남겨서 자식들 교육비, 생활비로 사용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이상수 목사는 그 이후 협회 통일교 전도 국장이 되자 목사 사모들을 모아 놓고 단 10원도 공금을 횡령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는 언제나 먹는 것마저도 허락되지 못한 생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제 8장 서울 노원교구에서경기 화성 교회로 강제로 인사 이동 제 1 절 이재남 한국 협회장과 박길남 교구장의 거짓약속 1981년 10월 19일부터 21일까지 수택리 교회 김민중 목사를 모시고 3일간 부흥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서울 노원교회는 이제 교인들이 다 앉을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강제 인사 이동 처사로 충격을 받아 또 한번의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문선명은 서울에 있는 통일교를 집중 발전시키고 통일그룹 내 기업체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많은 통일교 교인을 회사에서 퇴사시키는 잔인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통일교는 이단이며, 사이비 종교로 사회에서 인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처럼 발전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통일교에 교인 한 사람을 전도하여 부흥시킨다는 것은 기독교 이름으로 부흥 시키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목숨을 걸고 교회를 부흥 시켜 넘치게 만들었는데 또 다시 빼앗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20일 경기 수택리 중앙 연수원에서 목회자 중 1968년에 합동 결혼식을 한 사람 430가정 이상 목회자는 지방 교회에서 서울 교회로 올라와 목회 하라고 인사발령을 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통일교 수는 영구 통일교, 전세교회, 월세 교회 다 합해서 27개밖에 없었습니다. 27개 교회를 400개 교회로 늘리기 위해 통일재단 기관기업체 430가정 이상 되는 사람은 전체가 사표를 내도록 하고 300만원씩 주면서 방 한 칸을 얻어 서울 400개 동 가운데 1동씩을 맡아 교회를 개척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400개 개척교회에서 수십 개로 축소되었습니다. 김민중 목사가 수택리 집회에서 결정이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였을 때 저는 문선명 특유의 잔인성이 또 드러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통일교 기관 기업체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모든 생활을 박탈 당하고 행복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간부들 가운데 고통 당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정이 파탄되어 통일교를 떠나는 상처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통일교 기업체 간부들을 강제 퇴직 시켰던 것은 기업체를 살리기 위한 구조 조정 이었습니다. 언제나 이중 인격자인 문선명은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회자도 이용하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가차없이 잔인하게 잘라버립니다. 1981년10월 21일부터 서울 시내 통일교 목사들의 인사 이동 문제로 목회자 전체가 모여 매일 회의를 하였습니다. 박길남 교구장은 "박준철 목사는 교회를 3번이나 개척하여 교회를 건축을 했기 때문에 반드시 부당한 인사 이동을 하지 않고 수도권 안에 위치한 부천이나 부평 교회로 발령을 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다른 목회자들도 박준철 목사는 실적을 많이 쌓았으니 그 동안의 공적을 감안해서 이번에는 억울한 일이 없도록 인사 이동을 시컥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재남 한국 협회장은 본부 교회에 주일 예배 때나 설교 때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 같은 사람도 있다고 말한 것을 들었고, 문선명에게도 노원교회의 박준철 목사 공적을 보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사이동 공문에는 약속과 신의를 져버리고 '경기교구 부' 라고 해놓고 임지교회도 없이 저를 잘라 버렸습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이재남 한국 협회장과 수 차례 만나 10시간도 넘게 대화했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김영휘 협회장과 김민중 목사는 문선명이 지방에 있는 목회자를 서울로 올리라고만 했고 서울 시내에 있는 현직 통일교 목사들은 자기 교회에 그대로 시무 하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재남 협회장은 부당한 강제 인사이동을 통해 저를 갈 곳도 없이 잘라버렸던 것입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기관 기업체에 근무하던 430가정 선배들이 너무나 큰충격을 받고 청파동 본부 교회에서 대문 밖에 프랭카드를 크게 걸고 데모를 하였습니다. 본부교회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협회 2인자인 양준기 총무국장은 무차별으로 폭행을 당하고 양준기 협회 총무국장이 병원에 입원하는 불상사가 벌어졌습니다. 이같은 폭력,폭행 사태에 전투 경찰이 투입되어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저는 10월 20일~1982년 1월 17일까지 3개월 동안 '경기교구 부' 라는 인사 발령 때문에 제가 시무 해야 될 교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아 병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3개월을 아내와 자녀들과 같이 피눈물을 흘리며 보내야 했습니다. 통일교를 그때라도 탈출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때도 저는 통일교를 떠나면 지옥에 가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통일교를 탈퇴하는 것이 죽음 그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마음의 충격을 해소할 길이 없어 산 기도도 가보고, 큰 기독교 교회도 가서 기도도 하였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움에서 벗어나려고 하여도 벗어날 수 없고 울분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문선명을 위하여 제물이 된 저는 한없는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이를 악물고 노력하였습니다. 헤아릴 수없이 많은 성초 기도를 몇 시간씩 눈물로 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원리 교육으로 세뇌되어 있어서, 문선명이 메시아요, 재림주라고 믿고 충성하며 재림주를 버릴 수 없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노원 교구에 임지를 받은 사람은 정한길 목사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언제 이사를 가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갈곳이 없기 때문에 갈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목사는 교회에 취임도 하지 못하고 암으로 죽었습니다. 지옥 같은 노원 교회 대기발령 생활 3개월이 다 되어 가는 1982년 12월30일에 협회에서 가평 교회와 화성 교회(오산교회) 중 선택하여 목회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가평이나 화성(오산)은 교인이 몇 명에 불과하여 생활을 할 수 없고, 이재남 한국 협회장이 약속을 어겨서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억울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노원 교구 예배 수준과 재정 수준으로 수평 이동이라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선명의잔악상을 보면서도 그때는 문선명의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제 2 절 꿈에 나타난 문선명 1982년 1월 4일 밤 꿈에 문선명이 나타났습니다. 전국 통일교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하던 중에 산봉우리 5개를 보여주면서 이 산을 개발할 사람이 없느냐고 했는데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문선명이 제 앞에 오더니 "박준철! 네가 이 산 5개를 개발하라" 고 명령했습니다. "네가 임자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삽과 낫을 주었습니다. 꿈을 깬 후 생각을 해보니 산봉우리 5개는 화성(오산)이었습니다. 사명감이 충만한 목회자가 없어서 화성교회(오산교회)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목회자들이 화성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경기 교구에서도 제일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전국 통일교에서도 제일 가난한 교회 중 한 곳이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이 못난 사람을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가 또 한번 꿈에 현몽을 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화성교회로 가라는 명령 인줄 알고 순종하는 맘으로 죽더라도 오산교회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오산교회로 부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9장 경기화성교회가 전국 통일교 최우수교회로 부흥
제 1절 다시 일어선 교회 개척 1982년 1월 17일날 배신과 불신 속에서 그동안 닦아놓은 기반을 송두리째 남겨두고 어린 3남매와 처를 데리고 오산교회로 왔습니다. 그리고 1982년 2월 17일에 취임식을 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가는 목사마다 잠시 있다가 떠나버렸습니다. 오죽하면 문선명은 집회를 하면서 오산교회는 사단역사를 하는 곳이니 이름을 진산 교회로 바꿔야 한다고 할 정도엿습니다. 전임목사는 제직당시 승공 연합의 돈 1천2백 만원 때문에 오산교회 교인들과 승공 연합 회원들이 큰 시험에 들었습니다. 전임목사는 오산교회 사택에서 살지 않고 수원에서 살면서 전국을 다니며 양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 있던 목사도 교인이 얼마 되지 않고 헌금도 몇 만원에 불과하여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유치원을 개설하여 그 수익금을 생활비로 썼는데, 이를 알게된 전도 대원 몇 사람이 협회에 올라가 목사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여 문책 인사이동을 시켜 버렸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통일교 목사들이 문선명을 재림주, 참 부모를 믿고 순종하며 목숨을 바친 죄밖에 더 있겠습니까? 저 자신도 불쌍하지만, 너무나도 처절하게 불쌍한 사람들이 통일교 목사들 입니다. 저는 경기 화성교회로 가면서 각오를 단단히 했습니다. 사단 마귀가 역사를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정성을 들여 빠른 시일 내에 발전을 시키겠다고 굳은 각오로 다짐했습니다. 저는 취임하는 날부터 100일 기도,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 수요예배 개설, 금요 속회예배 개설, 주일학교 개설,중고풍부 예배 개설, 전도, 심방 등을 중심으로 교회의 발전에 온 몸과 마음을 다 쏟았습니다. 노원교구 본부에 있을 때 자전거도 없이 걸어 다니면서 심방과 전도를 하며 봉사 했었습니다. 나중에 오인천 영화 출연료로 받은 2만원으로 중고 자전거 1대를 사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심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속회예배와 전도를 하니 신바람이 났습니다. 노원구 상계1 · 2 · 3 · 4동, 도봉구, 중계동, 하계동, 공릉동까지 자전거를 타고 심방 전도 활동을 했듯이 화성교회에서도 자전거를 활용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화성 관내 17개 읍 면 동에 심방 전도를 다녔습니다. 이렇게 자전거를 계속 타니 새 팬티라도 한 달이 못 가서 엉덩이 부분에 구멍이 나고 헤어져 매달 팬티를 구입해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양쪽 엉덩이에 물집이 생기고 터져서 바지까지 버리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문선명 통일 교주를 위해 매일 밤 12시까지 심방 전도를 했습니다. 새벽 I~2시가 되는 때도 허다하게 많았습니다. 문선명에게 목숨을 걸고 한국 최고의 실적과 공적을 쌓는 한국 통일 교회의 푯대가 되고자 몸부림을 치며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문선명은 집회 때마다 "나는 호랑이니 너희들은 고양이 새끼가 되지 말고 호랑이 새끼가 되어라" 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말이 그 당시에는 꿀같이 달게 느껴졌습니다. 죽더라도 뜻을 위해 죽고 문선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굳은 각오와 결의를 매일 기도로써 다짐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활동을 하여 체력이 극도로 떨어지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의식 불명이 될 정도로 쓰러져 있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교인을 전도할 때나 교인을 심방 할 때면 저는 굶더라도 과자나 음료수를 사 가지고 심방을 했습니다. 화성교회에 교회 총무로 세웠던 추진복 집사가 있었는데 신앙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 합동결혼식을 하고 갓난 아들 하나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습니다. 튀김집을 운영했는데 저는 매일 그 집에 가서 축복 기도를 해주며 그 날 심방할 집에 가지고 갈 튀김을 샀습니다. 그 날 심방을 하는 집이 10집이면 10봉지를 사서 자전거에 싣고 다니며 전도하고 심방을 했습니다. 저는 추진복 집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다른 가게에서 사지 않고 그 집에 가서 튀김을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사랑과 정성을 알아주기는 커녕 추진복 집사는 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추진복 집사 집에 가서 조용히 신앙적 인 교육을 시키려고 했는데 첫마디가 욕 이었습니다. 왜 욕을 하냐고 했더니, 자기 가게 식탁을 저를 향해서 밀어 버렸습니다. 그순간 오른손 약지가 식탁에 끼어 큰통증을 느꼇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고 당황하여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크게 부어 올랐습니다 즉시 병원에 가서 뼈를 수술했어야 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20일 동안을 방치했습니다. 손가락은 벌겋게 부어 올라 움직일 수 없었고 뼈까지 아팠습니다. 손가락 겉에만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습니다. 20일이 가도 손가락의 부기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조금씩 부기가 빠지고 괜찮아 졌지만 그날 다친 손가락 하나가 휘어진 채로 굳어 버렸습니다. 즉시 병원에 가서 X-ray 촬영을 하고 손가락을 고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손가락을 제대로 펼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추집사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저는 추집사가 성격 때문에 그런 것으로 알고 용서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추집사는 제가 그 날 다쳐서 일생동안 손가락이 구부러진 채로 사는 것을 지금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 추집사는 집에서 닭튀김을 할때 나오는 창자를 그날 그날 모아서 개를 기르는 이건숙 집사에게 주었습니다. 이건숙 집사는 개35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한 마리에 300만원도 넘는 좋은 개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추집사가 쥐를 잡는다고 닭 창자에 쥐약을 버무려서 여러 군데 놓았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무의식 중에 쥐약으로 놓았던 닭 창자를 새벽에 일어나 모아가지고 쥐약을 안 넣은 창자와 같은 그릇에 담았습니다. 그것을 몰랐던 이건숙 집사는 아침에 창자를 가져가 35마리 개에게 끓여서 먹였습니다. 그 창자를 먹었던 개들이 한 마리 한 마리 쓰러져 갔습니다. 이건숙 집사가 추진복 집사에게 무엇이 잘못 되었냐고 물었을 때 닭 창자에 쥐를 잡으려고 쥐약을 섞었다고 했습니다. 순간의 실수로 이건숙 집사의 고급 개 35마리가 죽었습니다. 그 일로 추집사는 몇 십 만원을 이건숙 집사에게 보상금으로 물어주고 튀김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 갔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제 2 절 화성 교회 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100일 기도를 마치면 2차 100일 기도, 3차 100일 기도로 숨돌릴 여유도 없이 교인들과 합심하여 기도드린 결과 1982년도에 교회가 급성장을 했고 전도 우수 교회로 협회장 상을 받았습니다. 1983년 4월과 9월에는 협회 우수 교회상을 분기별로 수상을 했습니다. 1985년도에도 전국 최우수 협회장상을 교회 우수상과 전도상 까지도 저는 받았습니다. 화성교회에서도 많은 이적기사가 있었습니다. 이준영 씨는 독자였는데 딸만 3명을 낳고 몇 년 동안 아기가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한다고 이준영씨에게 말했습니다. 얼마후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시어머니나 주위 사람들은 태몽이 또 딸이라고 아기를 지우려고 했습니다. 10달 동안 많은 시험과 시련이 있었지만 저의 말을 믿고 이준영씨는 아기를 지우지 않았습니다. 10달이 되어도 아기가 출생하지 못했는데 11개월이 되었을 때 마침내 건강한 아들을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 전체 앞에서 이준영 씨가 아들을 낳는다고 했는데 11개월이 지난 후 그 가정에 행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몇 대 독자인 강호길 씨도 아들을 낳은 후 통일교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종수 씨는 기독교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는데 악령이 3,000명이나 들어와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정신병원으로 갔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안수 기도도 받았지만 악령이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모든 친척과 가족들이 오산 통일교로 나오는 조건으로 악령을 물리쳐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동안에도 제가 악령을 많이 물리쳤기 때문에 그 가족들과 이종수 씨를 불러다 놓고 찬송가를 부르며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이종수씨는 교회 강대상 앞에서 기도를 받은 후 쓰러졌습니다. 한참후 이종수 씨가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오랜 악령의 시달림과 고통이 끝이 났습니다. 회사에도 복직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독실한 통일교 교인이 되었으며 친척들도 통일교에 모두 나오고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이종수 씨는 점점 더 헌신과 봉사로 충성을 다하여 화성 교회 재정 담당 총무까지 수행을 잘 했습니다. 문흥기라는 사람은 수원 빈센트 병원에서도 포기한 병자였습니다. 이제는 살 수 없다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제가 문흥기 씨를 보았을 때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고 몸에서 악취가 심하게 났습니다. 의식이 있다가 다시 없어지는 상태로 임종을 기다리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미 부인과 자녀들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문흥기씨만 교회에 안 나오는 상태여서 의식이 돌아 왔을 때 교회에 나을 것을 간절히 권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저는 기도를 했습니다. 문흥기 씨는 매일 고통으로 아우성 치던 사람이었지만 기도를 받은 그 날 밤에는 편안히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부터 기적같이 기력을 회복하여 걸어 다닐 수 있었고 일주일 후 건강을 회복하여 예배도 참석을 했습니다. 처음 2달은 열심히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러나 석 달째는 되는 주일부터는 일요일마다 막노동일을 나가거나, 교회를 오지 안기 위해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습니다. 저는 온갖 방법으로 문흥기 씨에게 말을 했지만 말을 듣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문흥기 씨는 석달 후 금요일 막노동을 잘 다녀오고 토요일 새벽에 이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회에서 적은 정성을 모아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 외에도 제가 가는 개척 교회마다 이적, 기사, 신유 은사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 문선명 재림주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가는 곳마다 스스로 희생 재물이 되어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화성교회도 전국 최하위에서 최상위 교회로 부흥 ·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 3 절 마지막까지도 아버지께 불효 소년 시절에 저는 아버지같이 불쌍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결혼하면 능력 있는 남편, 능력있는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존경 받는 아버지, 사랑 받는 아버지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에 입교한 이후 영혼과 육신을 빼앗기고 언제나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처절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릴 때는 자라서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어 부모에게 효도하겠다는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제대로 부모님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통일교에 들어온 후로 단 한 번도 부모님께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잔인한 문선명의 역사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문선명은 입으로는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외치면서 행동으로는 자신만이 참 부모이며, 육신을 낳아준 부모는 사단의 부모라고 주장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오직 자신만을 참 부모로 섬기라고 강요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1985년 9월 24일 고인이 되셨는데 제가 너무나 불효를 하여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픔니다. 아버지는 추석 명절 직전 화성교회에 오셨습니다. 막걸리 5병을 받아놓고, 사골을 사다가 끓여 국을 만들어 나름대로 아버지를 모실 준비를 했습니다. 서울 큰아들 집에 계시는 아버지를 직접 서울까지 가서 버스로 모셔 왔습니다. 오산 버스 터미널에서 화성 통일교 까지는 IKm 거리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저는 아버지 팔을 부축을 하여 교회까지 오는데 4차례나 길바닥에 주저 앉아서 쉬었다 오고 해서 겨우 도착했습니다. 교회로 모시고 와서 식사를 대접하고 술도 드렸습니다. 저녁에 주무실때 이불을 펴 드리면서 밤에 방에 있는 술을 많이 잡수시지 마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야, 이 놈아, 내가 술을 안 먹으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가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주무셨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첫 말씀이 "하동 집에 빨리 가야겠다" 였습니다. 저는 "며칠 저희 집에서 계시기로 하시고 오셨으니 편히 계십시오. 술, 고기와 여러 가지 반찬을 준비해 놓았으니 오래 계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님은 "준철아!" 하면서 "술 먹게 용돈이나 많이 달라" 고 했습니다. 아무리 가시지 말라고 말려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저는 다른 때보다 용돈을 조금 더 드렸습니다. 저는 서울로 모셔다 드렸고 아버지는 경남 하동 집에 가셔서 바로 운명을 하셨습니다. 71세로 고인이 되셨습니다. 생전에 아버지는 언제나 저에게 용돈을 많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제대로 용돈을 많이 드리지 못해 아버지께 죄송했습니다. 제가 언제나 목회를 성공하고 교회를 부흥시켜 안정이 되면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교회를 빼앗기고 처절하게 가난한 목사길을 걸었습니다 순리대로 통일교 목사 인사이동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문선명 교주의 명령 한마디에 교역자는 강제로 움직 입니다. 저는 아버님이 저희 집에 온 것이 마지막 오시는 길이고,용돈을 많이 달라는 것이 마지막 말씀인줄 알았다면 빛을 내어서라도 돈을 많이 드렸을텐데 교회가 어렵다보니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날 아버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술을 적게 잡수시라고 했던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일생동안 저는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언제나 불효자였습니다. 성공해서 부모님을 편히 모시겠다는 다짐을 한번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땅 속에 계신 아버지께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아버지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신 후 생전에 아버지 앞에 음식 한번 제대로 해 드리지 못한 것이 가슴이 아파 음식을 대할 때마다 한동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아버님께 못다 한 효도까지 합하여 어머님께 효도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목회 현실은 성공해서 교회가 안정되면 폭력적인 인사이동으로 또다시 지옥 같은 개척 교회 생활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저를 낳아준 육신의 부모는 사단의 피를 이어받은 가짜 부모라고 했습니다. 문선명만이 인류를 구원할 참부 모 재림주라고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할 경제적인 능력이나 시간이 허락되지않았으며 오직 저를 구원하신 인류의 구세주 문선명 참부모에게 그 당시에목숨을 바쳐 충성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머님께 효도하는 길마저 막아 버렸습니다. 처절한 가난한목사 생활에서 헤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광란의 부당한 인사정책으로 부모님에 효도하는 길마저 잔인하게 막아버렸습니다.
제 10장 서울 노원 교구본부 교회로다시 인사발령
제 1 절 통일교에 바친 목숨 저의 생활은 또다시 하루아침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 이였습니다. 화성교회에서는 재적 인원 160명에 헌금은 약 200만원이 되었습니다. 통일교 내에서는 최고 A급 교회로 성장을 시킨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전도하고 교회를 부흥시킨다는 것이, 이단 교회라는 이미지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화성교회의 20분의 1도 되지 않은 서울 노원교회로 부임하고 보니 눈물 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혼자라면 밥을 먹지 않고 굶어도 라면이나 국수만 먹어도 괜찮습니다. 버스 차비가 없으면 얼마든지 걸어다닐 수 있습니다. 병이 들어도 병원에 안 갈 수도 있습니다. 가난은 인내와 극기 훈련하는 심정으로 참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라도 통일교 목회를 그만두고 통일교를 탈출 했다면 지옥에서 15년 전에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저 혼자 고통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아내나 자녀들에게 남편 잘못 만나고 ,아버지 잘못 만나 너무나도 비참하고 가난한 생활을 계속적으로 강요하는 제 자신이 정말 싫었습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 을 때는 강서교구 본부교회로 부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강서 교구는 교회를 건축한 후 헌당 예배도 못 올리고 건축 2달만에 눈물로 떠난 교회였기에 목회 생활을 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강서 교구 본부 교회로 가서 저의 슬픈 과거를 청산하고 한국 통일교에 선봉장이 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저는 서울 강서교회를 자랑스러운 통일교로 만들 자신이 있었습니다. 협회에서 강서교회로 옮겨 주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강서교구는 1963년도 합동 결혼식을 한 124가정 진철수 목사가 있었는데 그는 서울 구로교회로 가고 제가 서울 강서교회로 가기로 결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 구로교회 목사님이 떠나지 않음으로 제가 강서교회로 취임을 하지 못하고, 서울 노원 교구 본부 교회로 재취임을 하게 된 것이 었습니다. 제 2 절 서울 노원교회에서 3차 발전 1986년 5월 18일 경기 화성교회를 떠나 서울 노원교회에 취임했습니다. 배고픔, 슬픔, 아픔, 분노, 배신감을 인내로서 극복하며 숨 돌릴 틈도 없이새벽 제단에서부터 수요 예배, 300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예배, 기도,전도, 봉사, 심방을 중심으로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김 영휘 협회장님은 노원교회에서 일생동안 목회를 하라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한국 최고의 교회를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1986년 5월에 부임하여 노원교회 교인들과 합심하여 밤낮 없이 목회활동을 한 결과 7개월만인 12월에는 노원교회를 교인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매일 심방과 전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을 위해 이사짐을 날라주고, 실직자를 취직시켜 주고, 신유 역사로 귀신 들린 자를 건강하게 완쾌 시켰습니다. 무엇이든지 교인들이 원하면 저는 손과 발이 되어 사명을 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86년 6월 29일 주일예배에 바쁘신 중에도 김영휘 한국 협회장과 정대화 사모님(회장)이 노원교회에 순회를 오셔서 주일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참 자녀가 되자는 설교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역대 협회장 중 ,저의 능력을 인정해 주시고 시련과 고통 당할 때마다 격려하며 희망, 용기를 주신분은 김 영휘 한국 협회장님 뿐이었습니다. 김 회장님은 저를 가장 염려하며 고통 당할 때마다 저의 억울함과 능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김 영휘 한국 협회장님은 전국 통일교 순회를 하시면서 목사들에게 서울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와 같이 최악의 조건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성공적인 목회를 해야한다고, 그것이 박목사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리석었고 바보였습니다. 하나님 이름을 이용하고 성경을 인용하여 자칭 재림주로 통일제국을 꿈꾸는 가짜 메시아를 저는 자랑하고 증거 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를 위해 통일교를 부흥시키고 발전시켜 수많은 영혼이 이단에 빠지게 하는 일에 저는 앞장섰던 것입니다. 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국 통일교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통일교에 모델이 되고자 노원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일이면 사력을 다하여 일을 했습니다. 통일교 기관, 기업체에 새로운 교인을 전도하여 취직을 시킬 때 부족한 사람들의 취직을 부탁하다 보니 커피, 식사비, 섭외비 등의 경비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직접 냈습니다. 그러면서 부장이나 이사에게 교회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하여 취직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가정의 물질적인 고통도 아내와 자식들의 마음의 고통도 외면한 채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교인들을 위해 제 전부를 다 주었습니다. 마음, 몸, 물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습니다. 처절하고 가난한 생활에도 아내나 자녀들보다 교인들을 더 사랑했기에 노원교회도 부흥되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제 11장 서울 노원 교회가한국 통일교 우수 교회로 협회장상 수상 제 1절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 1986년 6월부터 1987년 6월까지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고 바쁘게 살았습니다. 교회 재정이 어려워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녀들의 교육비는 밀리기가 일수였습니다. 아내가 절약을 하고 또 절약을 하여도 가정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경기 화성교회에 내려가기 전 노원교회를 개척 할 때는 저의 자녀들이 갓난 아기였기 때문에 교육비는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커서 지출은 많고 수입은 적어 아내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도 꿀 먹은 벙어리같이 할말이 없었습니다. 결혼 전에 저의 아내는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과 같이 넉넉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에 입교하면서 부모와는 담을 쌓았습니다. 딸이 이단 교회에 다닌다고 야단을 치다가 화난 부모님에게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집을 나와 순전단 생활을 한 6개월 동안 부모님이 울면서 찾아와 애걸하며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저의 아내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통일교에 세뇌되어 부모 가슴에 못을 박고 불효를 했습니다. 속담에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 떡을 얻어 먹는다' 는 말이 있듯이 부모 말을 듣지 않은 자녀는 불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수없이 많은 역경과 시련을 딛고 가난한 목사 사모로서 살아온 것에 대하여 제가 교회를 부흥시켜 안정이 되면 장인, 장모님께 효도 할 것을 누차 다짐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를 발전시키면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생활이 안정이 될 것이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1986년에는 경기 화성교회에서 백 만원 정도 생활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서울 노원교회로 오니 매월 총 헌금이 10만원 남짓 이었습니다. 교인들은 많아도 새 신자이고 철거민 달동네이다 보니 다들 생활이 너무나 어려워 교회 재정도 어려웠습니다. 저는 교회를 급속도로 부흥시켜 매월 30만원의 생활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비하면 엄청나게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30만원의 생활비를 받으면 십일조 헌금, 감사헌금을 제하고 활동비로 15만원을 써야 했습니다 10만원을 가지고 저의 아내는 자녀 3명 학비, 학원비로 써야 했습니다. 1988년 1월 12일 은주와 영진이 쓴 반성문 중에는 '나는 동생과 먹는 것 때문에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다. ', '나는 누나와 먹는 것 때문에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다. ' 라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3남매를 바라보며 제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오뎅이나 떡볶이도 제대로 먹일 수 없는 현실 앞에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제 2 절 3차 교회 대지 161평을 매입 노원교회는 주일 예배에 늦게 오는 교인은 교회 의자에 앉을 자리가 없어 교회 밖 출입구에 서서 예배를 드려야 할 정도로 발전하였습니다. 저는 1987년 1월 1일 하나님의 날 예배 때 교인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3번째 교회 건축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의 모든 기도 내용이 교회건축으로 모아졌습니다. 서울의 강북 교구는 월세 교회가 13곳이나 되고 전세 교회가 11곳이 되었슬니다. 월세금, 전세금도 통일교 협회나 재단에서 지원하기가 어려운 입상이 었습니다. 그러나 노원교회는 단기간에 한국 최고의 부흥과 발전된 교회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박준철 목사가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이루는 부흥사, 단기간에 선배 목사들을 제치고 부흥 시켰다고 문선명에게 보고가 되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단독으로 수차례 만났습니다. 그 당시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인정받고 사랑 받는 것, 단독으로 찾아 뵌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건축을 목표로 1차로 교회 대지를 매입 하기로 했습니다. 하루종일 교회 대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에 살 것인가를 길을 가면서도 식사를 하면서도 온통 노원교회 대지 사는 생각만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에 교회 건축 대지 매입을 목표로 매일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협회에서 5월 19일 반 승낙이 떨어졌습니다. 5월 27일부터 6월 8일까지 1차 릴레이금식을 실시했습니다. 6월 5일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한 김영휘 협회장에게 노원교회 교회 대지 등본 지적도, 도시계획원 등 여러가지 서류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건축에 적절한 3곳을 선정하여 서류를 갖추어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무려 8차례나 문선명에게 "박준철 목사가 그렇게 사명감이 철저하고 가는 곳마다 통일교 목사들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능력이 있는 목회자라면 노원교회 교회 대지를 사 주어야겠구만"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한남동 유엔 빌리지 문선명 저택에 가서 직접 노원교회 교회대지를 사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6월 5일 서울 강북 1교구 책임자로 있는 임순도 교구장에게 밤12시 30분까지 말씀을 드리고 집에 오니 새벽 2시가 되었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바늘 방석이요, 초조하고 긴장과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떨리는 순간 이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제가 교회 건축을 하여 한 단계 더 크게 발전하느냐, 현재에 그대로 머무르느냐 하는 순간 이었습니다. 6월 6일 서울 강북 교구 총 책임자로 계시는 임순도 교구장 내외분이 상계동에 오셔서 교회 대지로 매입 할 수 있는 몇 곳의 땅을 보았습니다. 6월7일 김영휘 한국 협회장과 임순도 교구장이 문선명에게 박준철의 과거 실적과 사명감, 현재 교회 발전을 1년만에 10배로 발전시킨 것을 간절히 보고를 드렸습니다. 6월 8일 김영휘 회장이 문선명에게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해야 한다고 또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물의 날 행사장에서도 잠시 시간을 내어 노원교회 교회 대지 문제를 김영휘 회장께 말씀 드렸습니다. 6월 12일 협회에 가서 김영휘 회장을 만나 노원교회 교회 대지 매입 문제로 눈물어린 심정으로 또 부탁을 했습니다. 6월 13일 문선명 교주는 노원교회에 161평의 교회 대지를 사라고 2억 2천만원에 싸인을 해주었습니다. 문선명이 2억 2천만 원에 싸인한 것은 통일교 재단 본부의 결정이 아닙니다. 저를 한국 최고의 통일교 부흥사로 인정하고 특별히 문선명이 돈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교회 건축비는 노원교회를 매매하여 마련했습니다 저는 교통과 모든 시설을 감안하여 노원 전철역 옆에 교회대지를 매입했습니다. 저의 꿈에 여러 교회 대지 중상계 2동 380번지 1호 땅을 사라고 땅 모양까지 보였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대지 매입 결재가 결정 났다는 김 영휘 회장의 전화로 듣고 만사를 제치고 버스, 지하철을 타고 청파동 통일교 협회 사무실과 본·곁 교회까지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김영휘 회장께 감사를 드리면서 죽도록 충성하여 노원교회를 발전시켜 넘치는 노원교회로 만들 것을 약속 드렸습니다. 역사적으로 서울 노원 전철역 옆 380번지에 교회대지를 매입했습니다. 교회 대지 계약금, 중도금, 잔금은 협회와 재단에서 직접 땅 주인과 만나 제가 있는 자리에서 전달을 했습니다. 상계 3동 140번지 4거리 코너 통일 교회는 주위의 부동산에 팔기 위해서 매물로 내어 놓았습니다. 1979년 5월에 처음 노원교회를 지을 때는 총 1천 6백 10만원이 들어갔는데 7천 2백 만원을 받고 팔았습니다. 교회 위치가 좋아 높은 가격에 팔게 되었습니다. 노원교회 매매 대금은 계약금, 중도금, 잔금을 협회와 재단에서 담당자가 와서 돈을 받아 갔습니다. 통일 교회는 교회의 대지 매매, 모든 서류나 부동산 처리는 목사들이 하지만 교회대지를 사고 팔 때 일절 돈을 만지지 않고 협회와 재단에서 전국 통일교 재산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1987년 6월에 교회대지를 매입한 후 노원교회 교인들과 합심하여 연말까지 교회 발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12장 서울 노원교회 교회 건축
제 1 절 1988년도 교회 건축 목표 1988년 노원교회 목표를 교회 건축의 해로 결정하고 1월 1일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철야 기도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1월 1일부터 4월 10일까지 교회 건축을 위한 1차 100일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를 드리기로 결정하고 시행을 했습니다. 저는 1월 1일 오전 9시에 문선명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문선명 말이 '꿀같이 달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통일교 원리 교육으로 무장되고 세뇌되어 있기에 그렇게 많은 고통과 배신과 속임을 당했으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재림주 참 부모님 이라고 증거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통일교 원리 강의를 했습니다. 1월 1일부터 쉬지 않고 전도, 심방을 했습니다. 다른 목회자들은 연휴라고 쉬지만 저는 매년 새해의 첫 시간, 첫 날, 첫달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정성을 드렸습니다. 제 자신이 교회 건축에 미쳐 있었습니다. 협회와 재단을 매일 찾아가서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빨리 해달라고 간절히 말씀 드렸습니다. 초조하고 안타까움만 나날이 더하여 갔습니다. 1988년 5월 1일 통일교 협회 창립 기념일에 노원교회가 전국 통일로 우수 교회 협회장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저는 1년 안에 12명 이상 전도한 목사나 교인들에게 주는 전도상과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을 받았습니다. 제게 상금으로 20만원과 구두 티켓 한 장을 주었습니댜. 그 돈으로 주일날 음식을 장만하여 교인들과 같이 먹었습니다. 1988년 5월 2일 월요일에 한남동 문선명 저택을 방문하였습니다. 새벽기도 후, 문선명에게 선물을 하려고 경동 시장에 가서 최고 품질의 바나나 한 상자와 참외 한 상자를 샀습니다 택시에 싣고 한남동 문선명 저택에 도착 하였습니다. 김영휘 협회장과 사모님이 계셔서 선물을 드리고 문선명에게 교회 건축 문제를 말씀 드리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김영휘 협회장께도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말씀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 답변이 문선명의 승인이 안 나와서 교회 건축 공사를 못 한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를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문선명이 일화제약에 갔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은 결판을 내야겠다는 심정으로 수택리에 있던 일화제약으로 달려갔습니다. 일화제약 건물 옥상에서 문선명 참 부모가 통일교 기업체 사장들과 같이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앞에 나아가 땅바닥에 머리를 대고 경배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문선명 통일 교주는 저를 보시더니 "너 여기 어찌 왔어? 어떻게 왔나?"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수많은 통일교 목사들 중에 저의 얼굴을 문선명이 알아 주어서 감격했습니다. 문선명이 제 얼굴을 알아준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문제를 눈물로 호소하고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문선명은 교회 건축을 그 자리에서 허락하셨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에게는 먼저 교회 건축 공사를 시작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상계 3동 140번지 노원교회 매매 대금으로 빨리 공사를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김영휘 회장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으로부터 빠른 시 일 내에 교회 건축 공사를 할 것을 약속 받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제 2 절 국회의원 당선에 관여한 통일교 문선명 통일교 명령과 지시로 전국 통일교에서 국회의원 후보들을 지원하여 당선시킨 국회의원들을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 집결 시켜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당선사례 감사 인사를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국회의원 후보에게 서명 날인을 받은 후 맥콜 2백 박스를 지원하고 제가 있는 통일교 조직 전체를 가동하여 인적인 지원도 해주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지원했던 그 국회의원 후보는 400여표의 근소한 차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교에서 지원 받아 당선한 국회의원들을 모아놓고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서 2박 3일동안 통일교 원리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지원으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문선명 교주에게 복종해야 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공갈 협박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통일교 입당 원서를 쓰고 문선명 교주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문선명 통일교를 지지하고 찬동한다는 국회의원들은 문선명의 노예인 것입니다. 국회의원 후보 중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충성하겠다는 싸인을 한 국회의원후보를 경제적인 지원, 물질적 지원, 인원 동원 지원을 하여 저도 중진급 국회의원을 당선시킨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중진급 K 국회의원을 만나 문선명 교주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2박 3일 통일교 원리 교육을 받을 것을 간절히 말씀을 드려서 5월 5일 문선명 교주에게 감사 인사 갈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5월 5일 오후 2시에 K당 중앙 당사에 도착하여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기다렸습니다. 국회의원 비서관이 메모지를 저에게 전해 주었는데 국회의원은 총재와 조직 인사관계로 회의 중이기 때문에 문선명에게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K 국회의원이 충주 수안보 통일교 호텔인 와이키키 호텔에 가서 문선명에게 인사도 드리고 2박 3일 통일교 원리 수련을 받고 와야 한다고 설득을 시켰습니다. 비서관이 30분을 여러 곳에 연락을 한 결과 청량리 맘모스 호텔에서 K 총재와 인사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잠시 K국회의원을 호텔에서 내려오시라고 하여 K국회의원의 그랜저로 청주 수안보 와이키키 관광호텔까지 2시간만에 갔습니다. 저는 차안에서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위대성, 재림주라는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K국회의원은 자신의 업무가 바쁘기 때문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가서 인사만 드리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충주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 도착하니 문선명교주가 도착전이라 곽정환회장, 유종영 회장, 권혁서 교구장에게만 인사를 시켜 드렸습니다. 제가 호텔에 갔을 때 통일교 지원 받은 여야 국회의원 당선자 35명이 2박 3일 통일교 원리 교육을 받기 위해 도착해 있었습니다. 여러 국회의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저는 K국회의원과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인사를 드린 후에 그 길로 충주에서 서울 노원교회까지 도착하니 밤 12시 30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위해 사회의 고위층인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인사 시켰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K 국회의원에게 돌아 오면서도 2시간 동안 통일교 원리교육을 하였습니다. K 국회의원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박준철 목사가 제일 끈질긴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K국회의원이 도움을 받았으니 문선명에게 인사를 왔다고 하였지만 K국회의원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붉은 유혹에 말려들고 문선명의 정치적인 야심에 K국회의원은 이용 당했을 뿐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정치적인 야망과 정권 쟁취를 위해 통일당을 창당하고 국회의원을 포섭하여 통일교 교세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차후에 통일교 문선명 교주에게 관련된 사이비 정치 인, 종교인들은 정치 일선에서 낙선운동을 하여 낙선을 시컥 다시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 앞잡이 노릇을 못하게 1200만 기독교 교인은 철저히 막아야 할 것입니다.
제 3 절 노원교회 역사적 교회 건축 기공식 1988년 5월 6일 금요일 아침 7시부터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노원교회는 제가 철거민 달동네에서 먼지만 일으키는 허허벌판인 상계동 지역에 작은 방안에서부터 몇몇 통일교 교인들과 예배를 시작했던 곳이었습니다. 이제 3번째 노원 교구 본부 교회 건축 기공식을 한다니 감개가 무량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70년 된 낡은 집을 허무는데, 집 무너지는 소리가 폭탄 떨어지는 소리같이 컸습니다. 흙으로 된 집이라 무너질 때마다 흙먼지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물을 뿌려도 주위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가득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이단 교회를 짓는다는 소문이 교회 주위에 퍼져나가 주위 사람들이 데모를 하였습니다 교회의 옆에 집들이 시기하고 질투하여 항의를 하고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저는 집을 허물기전에 선물을 사서 집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래도 항의와 시비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바로 옆집에 살던 전과범은 알코을 중독자였는데 매일 수시로 와서 의도적으로 공사를 방해하였습니다. 대낮에 술을 먹고는 낫, 망치를 가지고 와서 공사를 집요하게 방해하였습니다. 수시로 술도 사 먹이고 담배도사 주고 용돈도 주었습니다. 때로는 강하게 말을 해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의 방해는 노원교회 교회완공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술만 먹으면 저를 가슴 아프게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를 짓기 전에 집이 폐허나 다름이 없는 집들이라 아이들이나 동네 불량 청소년들의 놀이 장소로 사용되어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밤중에도 사고가 없는지 와서 돌아보고 가슴을 졸이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집을 다 허물고 나니 속이 후련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후 4시에 통일 재단 김명운 부장으로부터 공사 중단하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의 지시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동안 통일교에서 목사 생활을 하면서 많은 충격을 받아 단련이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가슴이 철렁하였습니다. 저는 즉시 김영휘 협회장을 찾아가 간절히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호소하여 "다시 내일부터 공사 재개 할수 있게 해달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재단에서 공사재개를 시켜주었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 마치면 아침 식사 전부터 교회 건축 공사 현장에 가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오후에도 전력을 다하여 교회 건축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건축 공사는 통일교 회사인 일성 종합 건설회사에서 공사를 하였습니다. 1988년 5월 10일에는 대지 경계선 때문에 시비가 벌어져 주위 집주인들을 모시고 재 측량을 하였고 점심을 후하게 대접해 드렸습니다. 오후에는 주위의 아주머니와 주민들이 통일교 건축 중단하라고 몰려와서 데모를 하였습니다. 5월 30일에는 정득천 상계 2동 민정당 지도장을 만났습니다. 노원교회 주위에 200명 주민들이 통일교 교회 건축 반대 운동 서명해 놓은 것을 수습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청, 경찰서, 소방서, 동사무실, 파출소, 지역 주민들까지 수습을 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저는 노력하였고 잘 해결이 되었습니다. 저는 통장, 반장 주위에 큰 소리 치는 사람까지 다 접대하고 밤 11시가 넘어 교회에 왔습니다. 저는 노인회 등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하는데 인사해야 될 곳은 정성을 모아 조금씩 성의를 표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하는데 왜 이리시비가 많고 모셔야 될 어른이 많은지, 그 전에도 몇 차례 교회 건축을 하면서 느꼈지만 특별히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에는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주위의 반대와 시위 때문에 수습하느라 교회 건축을 완료 할 때까지 너무나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면 교회 건축을 하는데 가서 기도회를 하고 나무 정리,목재 정리, 철근 정리 등 매일 교회 건축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보를 만들고 심방을 하고 속회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국민연합, 승공 연합지부장을 만나 행사를 준비하는 등 1인 5역도 넘는 일을 매일 해 나갔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장을 잠시도 비워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1988년 5월 18일에는 지하공간을 흙으로 메우기 위하여 덤프트럭을 기다리다 잠깐 3동 에 있는 교회에 다녀왔습니다. 그 사이 15톤 덤프 트럭이 와서 지하실 바닥에 새까만 흙이 려인 것을 바닥에 붓고 가버렸습니다. 흙에서 땀새도 나고 하여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교회건축을 하면서 저는 깨끗하고 좋은 자재를 써서 최고의 아름다운 교회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콘크리트 친 공간에 악취가 나는 썩은 검은 흙을 메웠다는 생각을 평생 동안 하고싶지 않았기 때문에 공사를 지연시켰습니다. 오후에 상계동 전체 건축 공사장을 다 다녀 장복 건설 공사장에서 포크레인을 5만원을 주고 빌려 왔습니다. 트럭 2대를 3만원에 빌려서 포크레인으로 썩은 흙을 다 거두어 내어 깨끗한 흙으로 지하실 공간을 매웠습니다. 그땐 정말 속이 시원하고 기뻤습니다. 목수들이나 철근, 콘크리트, 벽돌 기술자들에게 내 집을 짓는다는 주인 정신을 가지고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6월 7일은 2층 철근 구조물을 제작 하였습니다. 저는 교회 건축에 새벽부터 밤까지 매달렸습니다. 저는 서울 시내 선배목사들의 부러움 속에서 노원교회 발전과 부흥을 위해 교회 건축을 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고난 중에도 감사했습니다. 저에게 일성 종합건설회사 현장소장 성하준 씨는 "목사님이 이렇게 철저한 사명감과 주인정신을 가지고 교회 건축공사를 하기 때문에 노원교회가 발전되고, 튼튼한 교회를 건축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장 소장이나 공사장 인부들이 저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 후 100년을 내다보았습니다. 제가 욕을 얻어먹더라도 튼튼한 교회를 건축하려고 교회 건축을 철저하게 관리, 감독을 하였습니다. 1988년 6월 22일 김영휘 회장과 정대화 사모가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장을 점검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김영휘 회장은 한국 통일교 협회장을 2회 째 맡고 있었습니다. 김영휘 회장님께 노원교회 교회 건축 설계도가 협회와 재단에서 잘못 설계되어 하나에서부터 백까지를 바르게 고치다 보니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에서 노원교회 교회 건축 설계 잘못으로 수십 차례 뜯어 고쳐야 했습니다. 김영휘 회장님과 교회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하실 뚜껑을 덮지 않으면 비가 올 때 비가 바로 지하실로 들어간다고 지하실 뚜껑을 해 달라고 하였고 물탱크, 안방, 벽돌도 적 벽돌로 공사를 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옥상에도 루핑을 깔고 검은 기와로 끝내는 것을 좀더 아름답게 구운기와로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담장도 앞면에 미관상 좋지 않은 시멘트로 만든 큰벽돌을 쌓는 것이 설계였는데 붉은 벽돌로 설계 변경을 하였고 대문도 없는 것을 만들었고 사택 올라가는 계단도 시멘트 계단이었는데 고급 계단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 외벽에도 페인트칠 대신 붉은 벽돌로 설계 변경을하였습니다. 한가지 한가지를 설계 변경 할 때마다 언쟁이 벌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협회 본부 간부들과 재단 간부들도 저보고 적당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이 저의 건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는 저의 집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저는 2급 장애를 갖고서도 사지가 멀정한 439곳의 통일교 목사들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여 노원교회를 전국 우수 교회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건강한 목사들보다 10배, 100배의 고통과 서러움, 외로움, 아픔을 갖고서도 저는 문선명에게 세뇌되어 교회를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어떤 통일교 목사들도 노원 통일교 교인들도 제 사정과 제 심정을 모를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온 신경을 저의 팔에 두고있기 때문에 항상 행동을 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저의 장애를 모르고 있습니다. 같은 통일교 목사들이 회의할 때나 공석 · 사석에서 반갑다고 갑자기 제 팔을 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왼 팔에 소대를 두툼하게 넣어 오른팔과 같이 크기를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저는 목회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해수욕장과 야외 풀장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일생동안 여름에 짧은 소매 옷을 입지 못하고 긴 팔옷만 입고 살면서 여름에는 긴팔 긴옷으로 인해 온몸에 땀띠와 전쟁을 하며 살았습니다. 목사들과 교인들이 "왜 짧은 소매 옷을 입지 않느냐?" 고 물을 태마다 저는 "습관이 되어서 괜찮습니다. "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들처럼 단 한 번만이라도 해수욕도 하고 짧은 소매 옷을 입어보는것이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모든 것을 제 운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선명은 전국 통일교 모든 합동 결혼식을 한 부인들에게 고향으로 가서 전도를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내는 고향으로 옷 보따리를 싸가지고 전도하러 내려갔습니다 전국 통일교 모든 목사 부인들과 합동 결혼식 한 가정의 부인들은 남편과 자식들, 직장, 장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전도하러 갔습니다. 통일교는 지금까지 매년 여름에 40일 하계 전도기간이 있습니다. 그 해에는 6월 7일부터 8월 30일까지 약 3개월 동안부부가 헤어져 살아야했습니다. 모든 통일교 교인은 전도 기간에 전도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합동 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들 가정은 하루 아침에 홀아비가 되어 자녀들과 같이 생활해야 했습니다. 저 혼자서 초등학교 5학년인은주, 3학년인 영진, 1학년인 은영 3남매 학교 보내는 일,빨래하는 일,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새벽 기도 후에 교회 건축 현장에 가서 어떤 사고가 없는지 돌아보고 기도 후 자전거를 타고 교회에 돌아와 부지런히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고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매일 국제 승공연합, 국민 연합의 조직 관리, 접대, 행사 동원, 세미나,전도 심방 등 저의 몸이 열 개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가쁜 나날이었습니다. 어느 때는 정신이 없고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주위의 통일교 선배 목사들이 제가 통일교 최고의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 하니 시기를 해도 저는 참아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모든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에게 가정의 행복과 사랑, 자녀교육, 생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가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은 말이 고향이지, 일생동안 통일교에 들어와 처절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였는데 무슨 돈이 있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고향으로 이사를 갈 수 있겠습니까? 통일교 목사와 합동 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자기 고향에 가서 문선명 교주가 참 부모요, 메시아 재림 주라고 증거 해야 하는 일을 생각할 때 저는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성공을 하고 출세를 해야 고향 생각이 나고, 여유가 있어야 부모 형제들도 찾아 뵙고 여러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게 됩니다. 통일교에서는 전국 통일교 목사들에게 주일 예배 한명에 몇 점, 새벽기도 한명에 몇 점, 전도 한명에 몇 점, 수련 한명에 몇 점, 교회 헌금에 몇 점, 통일교 합동 결혼식 하는 미혼 남녀 한명 전도에 몇 점 이렇게 점수제로 하여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미혼 남자한명 전도하는데 10만원을 지불하고 미혼 여자 한명을 전도하는데 15만원을 지불하고 이렇게 전국에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매월 평가제로 지금까지 교회의 등급을 매겼습니다. 이렇게 잔인하고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통일교 목회자의 길이며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한 교인의 길입니다. 통일교는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입니다. 각종 행사에 이용되고 그 행사를 위하여 끊임 없이 봉사하며 재산을 투자해야 되는 악순환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액 재산을 바쳐야 되는 통일교 교인들은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든 지경입니다. 저도 그런 통일교 문선명 교주를 만나 일생을 세뇌 되고 마취되어 청춘도 건강도 전부 빼앗겼습니다.
제 4 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상량식 1988년 6월 28일 상량식을 올리기 위하여 통일 민주당 청원군 위원장인 박동인씨에게 상량판을 받아 노량진 박동화씨에게 갔습니다. 상량판에는 붓글씨로 조국통일 선봉장 박준철 천지인 삼강 입주 상량이라고 썼습니다. 저는 교회로 돌아와 성염(소금)으로 성별을 하고 노원교회 상량식 봉헌기도를 드렸습니다. 사진을 찍고 음식을 교회 주위에 집집마다 돌렸습니다. 그동안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1988년 7월 3일에는 통일교 협회 문화부에서 노원교회 부흥과 발전을 취재하고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취재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매월 통일교에서 발행되는 통일세계에 노원교회 기사를 대서특필하기 위하여 유창수 기자가 와서 사진도 찍고 좌담회를 취재하였습니다. 이 기사가 1988년 7월달 통일 세계에 한국 통일교 부흥과 성장교회 탐방이라는 제목을 가지고"내일의 승리를 위해 도약하는 상계교회" 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특집 기사에 저 한 사람의 희생과 봉사로 문선명 통일 교주에게 충성하고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등불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발전한 소식을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알려서 조금이나마 자극제가 되어 전국의 통일교가 발전 하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때로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개척하여 부흥을 시켰더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랬다면 점점 대도시나 서울로 와서 통일교식 승진을 하였을 것이고 승승장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일 후배 목사로써 지방중소 도시도 아린 대도시도 아닌 서울 교구에서 개척을 하여 성공을 하다보니 언제나 선배를 위해 강제로 부당한 인사이동을 수 차례나 당하였던 것입니다. 바람 잘 날 없는 서울 교구에서 기적의 개척과 발전, 부흥, 교회건축을 반복하며 상처받고 폭행을 당한 것은 자칭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과의 정과 관계를 끊어가는 과정이였습니다. 저는 박대 받고 부당한 인사 이동을 당하며 세뇌에서 점차 깨어나 탈퇴하라는 하나님의 뜻 이었습니다. 제 5 절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당한 폭력과 폭행 저보다 직급이 높은 공릉교회에 김수정 목사가 있었는데 저보다 직급이 높은 선배 목사였지만 교회는 2층 30평 전세 교회였습니다. 교인이나 예배헌금이 노원교회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를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김목사는 회의를 하면서 때로는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1988년 8월 30일 공릉교회 월말 목회자 회의중에 김수정 목사에게 회의 때 연락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김목사는 저에게 욕설을 하고 폭행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제가 잠시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떠나 심방 하는 사이에 다른 목사들을 데리고 와서 노원교회를 자기 교회로 할 것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교회를 부흥시켜 교회 건축을 해 놓으면 선배 목사들이 빼앗았는데 또 저의 노원교회를 빼앗느냐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새끼!뭐 이런 새끼가 있어?너 한 번 맞아볼래? " 하면서 뺨을 때리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발길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승창 목사와 여동석 목사가 저를 뒤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김목사는 저를 무차별하게 폭행을 하여 허리를 다치고 가슴을 얻어맞아 입술이 터지고 코피를 흘렸습니다. 저는 한 달 반 동안 온몸이 결리고 허리와 가슴이 아파서 몸을 지탱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회의석상에서 폭행을 당하여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매스컴에 날까봐 병원에 입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놓고 협회의 김영휘 회장님과 김승철 국장, 각과의 국장단을 모시고 김수정 목사를 인사 위원회에 세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김목사의 양쪽 말을 듣고 결정을 하시라고 하였습니다. 양쪽 목사 말을 듣고 문책 인사 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목사는 문책 인사를 당한다면서 전세 교회가 아닌 강남의 큰 교회로 인사이동이 되었습니다. 남 잘리는 것을 배 아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여 폭행하는 목사를 예배와 교인이 많고 헌금이 많은 큰 교회로 승진 인사를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목회를 성공하고 능력이 많아도 제게 돌아오는 것은 지옥과 같은 목회 길뿐이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이 교회 건축헌금을 다해도 철거민 지역이라 몇 백만원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헌금을 제일 많이 한 통일교 교인이 50만원 정도였습니다 장로는 20만원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는 문선명까지 층층시하 어른이고 이 눈치 저 눈치 봐야 되는 입장입니다. 교회 목사라 할지라도 합동 결혼식 한 서열 순서대로 되기 때문에 교회에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나 대우를 받을 수 없습니다. 문선명의 명령에 따라 교인이 어느 날 갑자기 목사로 임명을 받는 때도 있고 명령에따라 목사직을 박탈 당하고 교인이 되어 통일교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교인은 구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 목사들은 통일교를 한꺼번에 50명~100명이 그만두고 떠나는 일이 많습니다. 모든 통일교 목사들은 일회용 목사입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많은 문제가 돌발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매일 매일 협회 지시에 숨이 막힐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 끝까지 차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건축을 하면서 내외적으로 영적인 싸움과 함께 교회긴축 공사 과정이 하나하나 진행될 때 전투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성하준 소장은 설계대로 한가지 한가지를 건축해 가야 하는데 건축을 잘 못하였습니다. 잦은 변경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재단 본부의 설계 잘못으로 모든 일을 현장에서 고쳐나가려다보니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습니다. 제가 협회나 재단에서 노원교회 교회건축을 하는 대로 두었더라면 교회건물은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성하준 소장은 성실하게 일을 잘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재단과 협회는 노원교회 목사인 저를 불러서 설계 도면을 만들었더라면 자재를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많은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와도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나이, 같이 합동 결혼식을 올린 통일교 협회 총무부장인 박석균은 저에게 "노원교회가 네 집이가?그만좀 해라. 적당히 좀 해라." 며 김승철 총무국장 앞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주인정신 없는 박 부장이나 재단 본부 김명운 부장 등에게 온갖 모욕과 무시를 당하며 피눈물로 노원교회를 건축해나갔습니다. 제 5 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준공을 완료 1988년 9월 29일 제3차 노원교회 건축 이전예배를 드렸습니다.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코너 노원통일교 시대를 마감하고 상계 2동 380번지 1호의 노원교회로 이사짐을 실어다 날랐습니다. 새벽에 문선명 사진을 모시고 정중히 새로운 교회까지 걸어왔습니다. 교회 대문, 3층 교회, 2층 사무실, 교회 사택, 1층 사무실, 식당, 방, 지하1층 방, 강당, 보일러 기계실 등 교회 전체를 성염(소금)으로 사단을 물리치는 성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무당이 하는 의식을 통일교에서는 하고 있기 때문에 저도 그때는 그 의식대로 소금으로 새로 건축한 교회 전체에 성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새로 건축한노원교회에 이사하는 날 떡 다섯 말을 하여 동사무실,파출소. 이웃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 반대 운동을산 900여명의 서명 날인을 한 집에도 떡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1988년 10월 10일 교회 대지 161평에 건물 554평, 지하 1층, 지상 3층 교회를 준공하였습니다. 한국 통일교 중 최고로 아름다운 교회로 교회 건축을 하였습니다. 12월 달에는 통일 세계에 표지 모델로 실렸습니다. 지금까지 통일 세계에 표지 모델은 문선명씨 사진이나 통일교 행사 사진 등 이었는데 통일교 30년 역사에 처음으로 노원교회가 표지 모델이 되었던 것입니 다. 그 동안에 저는 장인 장모님에게 효도 한 번을 하지 못하고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서울 박 서방이 노원교회를 개척하여 노원교회에서 3번째 교회 건축을 하고 이사를 했다" 고 울산에서 축하를 하기 위하여 올라 오셨습니다. 그리고 방에 가구가 너무 없다며 2층 절반 40평이 사택이었는데 거기에 장롱, 식탁, 가구 등을 2백만원의 거금을 들여 장만해 주셨습니다.
제 13장 통일교 아름다운 교회 헌당식
제 1 절 노원교회 3차 교회 건축 헌당식 1988년 11월 20일 노원교회에서 역사적 헌당식을 올렸습니다. 한국 통일교 김 영휘 회장님과 정대화 사모님 이 참석하셔서 격려사와 축도를 해 주셨고,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 이상덕 전도국장, 심평근 국장, 권혁서 제 1교구장, 김명대 제 4교구장, 김원종 목사 내외분 등 저의 친목회 목사들,서울 시내 선배 목사들이 참석하고 제가 목사로 있었던 경기화 성교회 교인들이 많이 참석하여 노원교회 예배 교회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축하예배 교인들로 가득 찼습니다. 헌당식에는 250명이 넘는 교인들이 와서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이 날을 위하여 살아온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모 당의 원내 총무였던 분이 대형 축하 거울도 기증을 하였습니다. 곽정환 세계일보사장, 문승룡 재단이사장 등 많은 전국의 통일 그룹기관 기업체 사장단의 이름으로 축하 화한과 축전을 엄청나게 보내 왔습니다. 저는 부족한 제 자신이 이렇게 통일교의 대표적인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했다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날 하루만큼은 외로운 마음, 배신감, 배고픔도 없이 꿈꾸는 심정 이었습니다. '노원교회는 저의 피눈물의 교회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노력과 기적의 교회입니다. 저는 목숨을 걸고 한국 최고의 실적과 공적을 가지고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인정을 받아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완공시킨 것입니다. 이제 저의 책임은 노원교회를 교회가 가득 찰 정도로 넘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나깨나 교회 발전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드리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 중에 통일교 교인들 가운데 5명에게 상계전철역 앞 벽산아파트 딱지를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딱지는 무허가 건물 4평, 8평 짜리로 30평 짜리나 25평 짜리 아파트 입주권 이였습니다. 조건은 노원교회 발전을 위해서 충성하고 저의 손발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참부모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교회를 만드는데 모든 것을 앞장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고 충성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너무나 큰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베풀었습니다. 제 2 절 베풀어 준 은혜와 축복을 배반으로 갚은 사람들 저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진심을 다해 도와주고도 뺨을 맞는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제 목숨보다도 더 아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을 제 아내나 자녀들보다도 더 아끼고 제 모든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반이라는 이름으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천국 백성이라는 통일교 교인이라는 이름을 갖고도 자기 목사에게 가슴속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긴단 말입니까? 은혜 뒤에 시련이 있다는 것을 통일교 목사 생활을 통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겪었습니다. 저는 노원 통일교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통일교에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통일교 한국협회 김승철 총무국장에게도 상계 전철역 앞 벽산아파트 30평짜리 무허가 건물 딱지를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김승철은 1962년도 문선명 통일 교주로부터 72쌍 합동 결혼식을 한 대 선배였습니다. 교구장도하고 협회의 이인자 자리에 있었습니다. 성북교회로 나가는 김승철 국장에게 문선명 참 부모님의 한을 풀어 드리자고 말씀드리고 저의 손발이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노원교회 건축도 하고 교회를부흥시켜야 될 책임과 사명이 있는데 김승철이 와서 노원교회 어린 교인들을 잘 교육시키고 이끌고 가는 신앙자가 되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노원교회에 사랑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간절히 부탁 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아파트를 사게 해 주어 이사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박주성 집사에게도 벽산 아파트 딱지를 사주었습니다. 후일 아파트가 완공되어 입주를 하였고노원교회로 김승철 국장부부와 박주성 집사부부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3명 중 2명은 노원교회 발전을 위해 제가 부동산 소개업소 역할까지 하며 아파트를 살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돈만 벌고 이사도 오지 않고 노원교회도 오지 않았습니다. 한 분은 저에게 아파트를 팔아 감사하다고 100만원을 저에게 주었지만 그 100만원을 돌려드렸습니다. 그분은 저를 격려해 주시고 희망과 용기를 주시며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 항상 저의 길잡이가 되어주신 분 이었습나다. 저는 말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100만원을 끝까지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노원교회에 있으면서 생애에 최고의 실수를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김승철 국장에게 아파트까지 살 수 있게 해주며 실질적인 돈을 벌게 해주었습니다. 문선명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노원교회에 충성을 해달라고 김승철 통일교 협회 총무국장을 성북구 종암동에서 데리고 온 것이 화근이 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자기보다 합동 결혼식을 한 서열순위가 아래인 목사에게는 잘 순종하지 않고 받들지 않습니다. 제가 김승철 국장보다 13년 늦게 합동 결혼식을 한 후배이다 보니 김승철 국장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노원교회 발전을 가로막고 방해하며 반대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노원교회 목사 노릇까지 다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목사인 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제가 추진하고자 하는 교회 일을 거부하며 불신하였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교회를 불신하는 문성숙 집사, 제가 아파트를 사 주었던 박주성 집사, 제가 40일을 통일교 원리강의를 하며 사랑으로 교육했던 고귀숙 집사 등을 끌어들여 저를 배신하게 했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불신의 주모자가 되어 노원교회에 오지 않고 아파트에서 불신하는 5명과 일요일 대예배를 드렸습니다. 저와 심정 일체가 되어 충성하게 만들지는 못할망정 어린 교인들을 사랑으로 바르게 신앙교육을 하지 않고 불신의 주모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받게 하고 해주었지만 은혜를 배반하고 노원교회 발전과 부흥을 가로막는 역적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김승철 총무 국장은 문선명 겹사돈인 홍성표 협회장(현재 문선명 통일교 교주와 원수가 되어 자녀들이 이혼하고 통일교를 탈퇴함), 재단 이사장 결재도 받지 않고 4천 만원을 협회에서 불법으로 가져와 2층을 전세 내었습니다. 제가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 직접 4천 만원이 홍성표 협회장 결재를 받은돈인가 물어 보았으나 결재한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그곳에서 목사 노릇을 하고 은혜를 배반한 통일교 교인을 끌어 모아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김승철 국장은 불법적인 행위를 했기 때문에 교회를 폐쇄하고 돈을 협회에 반납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의 70세 고희기념 잔치를 하라고 전국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에게 지시 하였습니다. 전국 시 ·군 ·구·면 ·동 통일교에서 교인들이 헌금을 하여 지역에 국민연합, 승공연합 노인들을 모아놓고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 부모로 증거하라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47년동안 교회각종 행사와 헌금 강요로 처절한 가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상계1동부터 10동까지 노원교회 교인들을 각 동에 한명씩 구역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동~상계10동까지 문선명 참 부모 칠순 잔치를 승공연합, 국민 연합 회원을 모셨습니다. 그 동에 사는 통일교 구역장과 교인들이 돈을 내어 잔치를 해 드린 것입니다 잔치를 다 하고 김승철 국장이 책임 지고 있는 상계 5동만 문선명 잔치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협회에 갔다가 김승철 총무국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전국 통일교에 목사들과 교인들을 진두 지휘하는 사람이 총무국장이고 다른 구역장들은 잔치 다 했으니 문선명 잔치할 돈 10만원을 내달라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왜 어려운데 돈을 걷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총무국장이 전국 통일교에 문선명 참부모 잔치하라고 통일교 목사들에게 명령 해놓고, 그런 말씀을 하면은 어떻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문선명 교주 칠순 잔치 때 자기 교회에 잔치하라고 50만원, 100만원 헌금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은 한국 통일교 이인자 자리에 있으면서 돈 10만원이 아까워서 저에게 야단을 쳤던 것입니다. 그 이후 김승철 국장은 문선명 고희잔치 돈을 내지 않고 간단하게 과일, 떡을 마련하여 잔치를 끝냈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전국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온갖 명령과 지시를 합니다. 김승철 국장은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100일 새벽 제단 기도를 하시오. 40일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하시오. 전도하시오." 등의 명령을 하였지만 김 국장은 노원교회와 100m도 안 되는 거리에 살면서 새벽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도 드리지 않고 아들이 군대에 갔다고 면회 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전도도 하지 않았고 십일조 생활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참으로 김승철 국장을 노원교회로 오게 한 것을 후회하였지만 그것은 때늦은 후회였습니다.
제 14장 노원교회를 왓은 문선명
제 1절 자칭 감동받은 문선명 저는 1989년 1월 1일 제22회 참 하나님의 날을 맞이하여 문선명에게 1년 한 해를 충성할 것과 절대 신앙, 절대 복종, 절대 사랑할 것을 맹세 했습니다. 문선명에게 영광을 돌리는 한해가 되자고 100명이 넘는 노원교회 교인들과 모여 철야 기도회를 드렸습니다. 1989년 노원교회 목표를 360명의 재적과 210명의 예배 목표를 세웠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새해를 출발하였습니다. 1989년 1월 9일날, 문선명이 큰아들인 문효진 장남과 문현진 삼남과, 곽정환 회장 등 기관 기 업체 사장단 20여명을 데리고 노원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문선명은 서울 시내 통일교나 전국 통일교 어느 곳에도 방문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 도착하기 30분전에 노원교회로 온다는 소식에 저는 너무나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 문선명을 맞이할 준비하는 시간이 너무나 촉박 하였습니다. 심장이 떨리고 어떻게 모셔야 할지 노원교회 교회건축 브리핑을 어떻게 보고 드려야 할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자칭 재림주 문선명이 노원교회로 오면 식사, 과일, 떡 등의 음식과 음식 담을 그릇, 상 등이 필요한데 모든 것의 준비가 부족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에게 급하게 전화 연락을 하여 노원교회로 문선명이 오시니 빨리 오시라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교회대문을 열어놓고 카메라와 필름 준비 청소와 교회 주변 정리 등을 일사천리로 준비 하였습니다. 그러나 준비가 다 되기도 전에 문선명은 통일교 최고위층 교인들과 같이 노원교회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서울 시내 통일 교회의 목사 중 제일 어린 목사였습니다. 그런데도 문선명은 저를 기억하시고 저의 교회를 부흥시키는 능력을 인정하시고 왔던 것입니다. 저는 지하 1층~지상 3층까지 곳곳을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브리핑하였습니다. 2층 사택 쪽으로도 모시고 가 구경을 시켜 드렸습니다. 문선명은 중국의 진시황제 때 9,999칸의 아방궁 같이 노원교회 교회 건물을 잘 하였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았습니다. 문선명에게 교회 전체를 보여 드렸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에 온 것만으로도 영광이었고 축복 이였습니다. 저는 문선명과 같이 찍은 사진을 확대하여 큰 액자에 넣어서 노원교회 교회 계단마다 걸어 놓았습니다. 통일 교회 목사들과 교인들은 문선명 참부모가 제가 목회하고 있는 노원교회에 내방하였다는 것을 안다면 자칭 구세주 문선명이 감화 감동을 받았파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가 노원교회까지 왔다는 것은 통일교 내에서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가치를 통일교의목사들과 교인들만이 알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 문교주에게 세뇌된 상태였기 때문에 노원교회가 자랑스러웠습니다. 1988년 7월 달에는 통일 세계에 노원교회가 한국 통일 교회의 우수 교회로 크게 소개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고난의 시간들이었지만 기쁨과 감사가 함께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하나님이 문선명까지 노원교회로 왕림하게 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15장 서울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비극적인 사건
제 1 절 동토의 왕국인 통일 제국의 교구장 임명
저는그 당시 이제야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여 기쁜 마음 이었습니다. 선배 목사들인 하계동이나 중계동, 월계동 등 여러 목사들이 저고 교구장이 되었다고 축하 인사를 하였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저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권혁철 교구장이 내일 오후 1시에 서울 시내 각 구 교구장들만 한남동 UN 빌리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 저택에서 회의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 저의 아내에게 이번에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내도 기뻐했습니다. 1991년 1월 6일 새해 첫 주일 예배를 맞아 저는 광고 시간에 전체 교인들 앞에서 어제 홍성표 한국 협회장이 서울 시내 교구장들을 임명하여 저도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후 1시에 UN 빌리지 문선명 참 부모님 공간에서 교구장들 회의가 있어서 다녀오겠다고 노원교회 교인들에게 보고하였습니다. 통일교는 온갖 아부를 교구장과 협회장에게 해야 출세를 합니다. 저는 출세하기 위해서 통일교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에 순수한 통일교 목사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문선명 교주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온갖 가시밭길을 피눈물을 흘리며 누명을 쓰고 강제로 부당한 인사 이동을 당하고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정으로 개척을 하고 성공하기를 반복 하였습니다. 저는 박탈감과 빼앗긴 배신감에 가슴 아픈 때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억울하게 폭행과 폭력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 항변하지 못하고 사회에 고발하지 못하는 제 처지가 한없이 미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노원 교구장이 된 것이었습니다. 노원교회에 모든 교인들이 저와 일심동체가 되어 교회발전과 부흥을 하여 문선명 재림주에게 충성 할 것을 더 더욱 다짐을 하였습니다. 모든 노원교회, 모든 통일교 교인들도 목사에게 교구장이 된 것을 박수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저는 늦었지만 교구장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동안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 10회와 교구장상 등 16회 총 26회를 수상 받아 통일교 역사에도 없는 최고의 실적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교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배 후 식사도 하지 않고 제가 평소에 존경하는 성북교회 교구장으로 임명된 김민중 목사님을 제 차로 같이 모시고 갔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가면서 서울 시내 동 책임자인 교회 목사들도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였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제 목사 회의에서는 서울 시내 각 구 단위 교구장들만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였는데 동 책임자인 교회장들도 후에 참석 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김민중 교구장과 같이 한남동 문선명 교주 저택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 시내 새로 임명받은 22명의 교구장과 교회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문선명 교주 부부가 단상에 앉아 있고 통일교 기관 기업체 사장들도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협회 이인자인 김승철 총무국장이 교구장 인사 발령을 다시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제 발표한 인사 발령 중 22명의 교구장은 그대로 발령하고 노원 교구장으로 발령 받은 저만 교구장 명단에서 제외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성동구 구의동에 있는 동책임자인 구의교회 서유성 목사를 교구장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저는 순간 심장이 멎고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단 하루 교구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다가 빼앗긴 것 이었습니다. 저는 배신감을 또 한번 느낌으로 문선명 교주와 멀어질 수 있었습니다. 구의교회 서유성 교회장은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이 전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 부인이 서유성 교회장을 전도하였던 것 입니다. 통일교는 크나큰 모순이요, 폐단이 있습니다. 가장 암적인 일이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영적으로 구원해 주었다고 하여, 믿음의 아들 딸이라고 호칭을 쓰는데 자신이 전도한 사람을 자기 자식 이상으로 통일교에서는 아끼고 사랑합니다.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취직시키고 신앙교육을 시키며 죽을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기하 급수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자 1년에 12명 이상을 전도한 사람에게는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을 시상하여 통일교 교인들 간에 경쟁을 붙이고 위화감을 조성하였습니다. 저도 전도한 사람이 통일교를 탈퇴한 사람까지 합하면 200명도 넘었습니다. 전도한 사람은 믿음의 아들딸을 출세시키고 생활을 돌보며 통일그룹 내에 회사에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취직을 시키는 일까지 책임을 지고 합니다. 저를 전도한 사람은 통일교 송탄교회 박길수 목사 부인 이었는데 그 목사는 자기 교회 부인 회장과 간통을 하여 아내와 자녀들 5명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통일교 부인 회장과 살림을 차렸습니다. 저는 저를 전도한 목사 부부를 가정이 파탄된후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통일교에서 1961년도 통일교 최초 합동 결혼식자인 36가정 곽정환 회장이 저를 전도하였다면 곽 회장이 저를 얼마나 잘 이끌며 출세를 시켰겠습니까? 제가 폭력과 폭행을 당하며 박해받는 통일교를 개척을 하여 성공하면 선배 목사를 위하여 강제로 7번이나 빼앗기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저는 서유성 교회장의 부인이 노원구 상계동의 김승철 총무국장 집에 와서 빨래며 청소, 부엌일등 모든 일을 파출부와 같이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김승철 국장집에 심방을 하였더니 김승철 국장이 전도한 통일교 교인 몇 십명이 모여 단합 대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전도한 사람중에는 통일 그룹 내에 핵심적 인 자리에 있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을 1년에 I~2차례씩 전국에서 초청하여 단합대회를 열어 과시를 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자기가 문선명을 믿게 한 통일교 교인들이 이렇게 많다고 세를 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족하고 힘이 없어서 제가 전도한 사람들을모 아 단한번도 단합 대회를 열지 못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는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믿음의 아들 딸이라 하고 전도 받은 사람은 전도해준 사람을 믿음의 부모라고 호칭을 합니다. 통일교 간부들은 그런 단합 대회를 자신의 생일날이나 명절 때를 택하여 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975년 2월 8일날 1,800쌍 합동 결혼식 때 결혼을 했기 때문에 후배 목사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통일교는 1961년부터 1963년까지 36가정, 72가정, 124가정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통일교 최고의 지도자이고 통일 그룹 내 핵심적 인 요직에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제 2 절 김승철 총무국장의 인사비리와 폭행사건 저는 1991년 1월 6일 첫 주일 오후 문선명 저택에서 전체 목사들 앞에서 일어나 감히 문선명 교주에게 직언을 하였습니다. 제가 언제나 처절하게 개척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건축하면 빼앗고 선배를 위하여 강제로 희생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7번이나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에게 제 충성과 실적과 공적을 보고하였습니다. 저는 통일교는공산주의보다 못하고 적당주의, 형식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I~2년이 있으면 다른 교회로 인사발령을 받아 가는데 왜 땀 흘려 목회를 하겠느냐고 말을 했습니다. 통일교는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력을 다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놓는 목사가 따로 있고 그것을 빼앗고 가로채는 목사가 따로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래서 어떻게 통일교가 발전이 되며 목회자들이 사명의식을 가지고 목회를 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 답변으로 문선명은 전체 목사들 앞에서 저에게 노원교회 박 목사는 그런 큰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승리하고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가는 개척교회마다 교회를 발전시키니 순종하고 다른 교회로 가면 또 교회를 발전시킬 것이고 후손 대대로 자손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흥분하여 문선명 교주에게 제 자신이 박해받고 억울한 가운데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말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제 목사 회의석상에서 권혁철 교구장이 통일교 협회로부터 저를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고 목사들 앞에서 발표하여 축하인사까지 받았다는 말과 김승철 총무국장이 자기가 전도한 믿음의 아들인 서유성을 교구장으로 저하고 바꿔치기 한 것이라고, 인사부장을 했다고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 없어서 그 말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제 말을 마치자 마자 분노와 배신감, 그 동안 김승철 총무국장의 행위를 생각하며 그 길로 문선명 교주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노원교회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제가 나오는 중에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 박목사 데리고 오라고 두 세차례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제 후임 목사로 왔던 엄철상 목사가 승진을 거듭하여 문선명 교주의 총애를 받아 비서실장이라는 요직에 있었는데 저를 붙들고 못 가게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박준철 목사를 데리고 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당시에 문선명 교주에게 그 동안에 쌓인 분노와 배신감 때문에 심장이 떨려서 터질 것만 같고 흥분하여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길로 노원교회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저를 교구장 명단에서 빼버린 후 동 단위 통일교 목사들이 자기가 가서 목회 할 곳을 제비뽑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제일 마지막에 남은 한 곳 노원구의 동 단위인 공릉동 통일교가 제가 시무 해야 할 곳이 되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저를 헐뜯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폭행을 하고 온갖 모함으로 노원교회를 빼앗아 자기가 목사 활동을 할 것이라고 했던 김수정 목사가 있던 곳 이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2층에 30평 전세 교회였고 교세도 노원교회 보다 20분의 1도 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따로 목사 사택도 없었습니다. 교회 30평안에 5평 정도를 합판으로 막아 작은 방 2개를 만들어 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저는 순간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힘이 없고 부족하여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을 생각하니 저는 24시간 동안 잠도 오지 않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배신감 때문에 심장이 떨려왔습니다. 저는 매일 매일 미친듯이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제 차를 타고 청평까지 과속으로 달려도 보고 판문점까지 통일로를 죽기살기로 달려도 보았지만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도봉산에도 가서 기도도 해 보았지만 해결이 되지 않고 점점 더 고통스러운 나날 이였습니다.
제 3 절 무차별적인 폭행으로 얻은 심장병
저는 김승철 국장의 인사 부정을 밝히기 위하여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 진실을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1991년 1월 7일 문선명 통일교 교주 겹사돈인 홍성표 한국 통일교 협회장에게 인사부정을 이야기하고자 한남동UN빌리지 문선명 저택에 찾아갔습니다. 문선명이 한국에 있을 때에는 매일 아침 7시면 통일그룹 내 최고위층 통일교인들 전체가문선명 저택에 모여서 자칭 구세주 문선명에게 경배를 드리고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노원교회에서 경배식과 새벽기도 후 새벽 5시에 그 추운 영하 10도가 넘는 날씨에도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기 위하여 문선명 교주 저택에 찾아갔습니다. 그 동안에는 교회 건축을 위하여 몇 번 김영휘 회장님과 같이 저택 안에 문선명 교주를 만나러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교주 저택에 들어가지 않고 저택 밖에서 홍성표 통일교 협회장이 문선명 교주에게 문안 인사와 경배를 하고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홍성표 협회장의 운전기사와 같이 살을 에이는 칼바람 같은 그 추운 겨울에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아침식사와 점심식사도 하지 않고 홍성표 협회장을 기다렸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부정인사에 대한 해명을 하지 않기 위하여 저를 속이고는 아침 9시경에 다른 통일교 간부의 차를 타고 통일교 협회 사무실로 가버렸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김정수 목사에게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를 피하여 한남동 저택에서 도망 왔다고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통일교 폭력집단의 한국 통일교 협회장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는 홍성표 협회장의 운전기사가 저를 속이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문선명 교주와 회의하는 줄 알았습니다 참으로 그 추운 겨울날 하루 종일 식사도 하지 않고 새벽부터 저녁 5시까지 그 긴 시간을 발을 동동 구르며 떨어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 바람이 저를 떨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통일교의 잔인한 폭력과 야비한 홍성표 협회장과 김승철 총무국장의 악한 행위 때문 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1월 8일 강남의 홍성표 협회장 집으로 찾아가 새벽 5시부터 밤7시까지 기다렸습니다.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가 만나 뵈러 왔다고 했지만,"협회장이 나가셨다" , "안 들어왔다" 고 계속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홍성표협회장이 저를 만나지 않기 위하여 집에서 운전기사와 서로 연락하며 피하는 것으로 알고 마음도 몸도 얼음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기진맥진하여 노원교회로 돌아왔습니다. 통일교에 입교하여 목숨을 걸고 온갖 박해와 가시밭길을 걸어온 목사의 길이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배신감에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끝없는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통일교 부정과 충격적인 쇼크로 저는 그만 화병을 얻어 심장병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통일교가 아니라 사람을 파멸시키는 죽음의 교회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겹사돈인 홍성표 합회장은 문선명 교주에게 최고의 충성과 사랑,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협회장 직에서 박탈당하였고 문선명 교주와 원수가 되어 겹사돈도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뇨와 여러 병으로 바깥 출입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첫째 아들인 문효진과 홍성표 협회장의 첫째 딸인 홍난숙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홍난숙은 25살의 나이에 이미 5남매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지만 문효진의 마약과 SEX, 감옥, 폭행을 참다 못해 이혼하여 가정이 파탄되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의 아들딸은 문선명 교주와 원수가 되었고 통일교를 탈퇴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아들딸을 바친 홍성표 협회장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을 것입니다. 홍성표 전 협회장은 당뇨병과 만병으로 거동도제대로 하지 못하고 폐인이 되어 문선명 교주에게 영혼과 육신을 빼앗긴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시 1991년 1월 11일 금요일 아침 9시에 통일교 협회 김승철 총무국장을 만나 눈물로 호소하고자 찾아갔습니다. 저는 그 며칠 동안 쇼크를 받아 매일 심장이 떨리고 숨이 가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조식 금식 기도를 하고 아침 일찍 김승철 국장을 만나기 위하여 청파동 협회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제가 눈물로 호소하는 소리를 김승철 국장은 단칼에 잘라 버렸습니다. 저는 김승철 국장이 노원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불신하는 몇 사람을 회개시키지 않고 끌어 모아서 저를 더 불신하게 한 것에 대한 직언을 하였습니다. 협회에서 교구장으로 발령하고 하루만에 김승철 국장이 전도한 서유성 교회 장을 교구장으로 바꾼 이유와 불법을 저지른 내용을 놓고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김승철 국장에게 왜 인사부정을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동시에 저에게 공갈 협박을 하며,주먹으로 제 뺨을 쳤습니다. 순식간에 제 입이 찢어져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자 저는 왜 때리느냐고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먹으로 제가슴과 배를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그리고 두 국장이 합세하여 저를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가하였습니다. 통일교 협회에는 홍성표 협회장만 없고 전 국장과 부장, 과장, 계장, 여직원들까지 모여 박준철 목사의 폭행장면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저를 잔인하게 두 국장이 무차별적으로 폭행하였던 것입니다. 협회 총무국 사무실에서 전체 직원들이 모여들어 저 한 사람을 가운데 놓고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지만 누구 한 사람 말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폭행을 당하여 몸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폭력에 대항해 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한 쪽 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 때문에 더 힘들었습니다 저는 몰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저의 양복과 와이셔츠는 피범벅이 되었고 옷이 찢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한참을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한 후 이상수 전도국장과 몇 사람이 일방적으로 폭행을 가하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국장을 제지하여 수습이 되었습니다. 저는 몸을 가눌 수도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겨우 협회 총무국을 나와 출입구 계단에 앉아 많은 시간을 보낸 후 겨우 의식을 회복하여 태릉 성심의원에 갔습니다. 병원에서 응급 처치후 4주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가정국장을 고소하여 감옥에 집어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당시에 마취되고 세뇌되어 문선명을 실망시킬 수 없어서 고소하지 못하였습니다. 노원교회 목사가 통일교 최고위층 협회 총무국장과 가정국장에게 부정 인사를 당하고 통일교 협회 사무실에서 무차별적으로 폭행까지 당했다고 신문에 보도되어 통일교가 망신당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노원교회에 돌아와 눈물로 몇 달을 보내야 했으며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두 국장의 폭행으로 인하여 저의 머리와 배, 가슴, 옆구리를 걷어차여 그 충격으로 회복할 수 없는 심장병을 얻었습니다.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에게 폭행을 당하여 피투성이가 되고 양복이 다 찢어진 모습으로 제가 노원교회에 돌아왔을 때도 어린 저의 자녀 3남매와 저희 부부는 절망하며 울었습니다. 매일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는 저를 보고 어린 저의 자녀 3남매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린 저의 자녀 3남매는 통일교 목사들이 사람 패는 깡패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깡패보다도 더한 폭력집단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이 폭행사건은 문선명 자칭 참부모 구세주를 믿고 '절대신앙, 절대복종,절대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세뇌되었지만 서서히 문선명 교주로부터 세뇌에서 깨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사랑 받았다면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제16장 빼앗긴 교구장직과 노원교회까지 쳐들어 온 김승철 총무국장과 협회 전직원 시위대 제 1 절 노원교회까지 쳐들어온 김승철총무국장과 협회 직원들 1991년 1월 13일 일요 예배날 이었습니다. 저는 온 몸이 아파서 몸을 가눌 수 없었지만 사력을 다하여 단상에 올라가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전체 교회가 가득 찬 가운데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막 시작한 순간 한국 통일교 이인자 김승철 총무국장, 이상수 전도국장(1962년도 합동 결혼식자), 김철현 가정국장 등 협회 전 국장과 협회 총무부장 박석규, 전도부장 오덕수 등 부장 전체, 과장 전체, 계장전체, 협회 여직원 전체를 총동원하여 왔습니다. 저를 쫓아내고 폭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협회장을 제외한 수십명이 노원교회로 데모를 하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저와 절친했던 신승철 가정부장과 김형길 문화부장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김승철 국장에게 미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승철 가정부장은 후일 간경화로 죽었습니다. 통일교에서 열정을 가지고 문선명 교주를 믿고 충성했던 사람중에 암병이나 심장병, 그 밖의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 제 주위에 많았습니다. 과중한 스트레스와 충격적인 쇼크로 죽은 사람이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의리를 지켜준 신승철 가정부장과 김형길 문화부장에 대해서 그 당시에고맙게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신승철 가정부장은 서울에서 같이 목회를 하며 노원교회 교회 건축 헌당식 때도 축전까지 보내주었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 헌당식 때 협회장과 간부들이 거의 왔었습니다. 그러나 협회 총무부장인 박석규와 전도부장인 오덕수는 오지 않았습니다. 헌당식에도 오지 않았던 박석규와 오덕수는 김승철 하수인이 되어 오니 배신감과 분노가치 밀어 올랐습니다. 일촉두발의 순간이었습니다. 교회 예배 시간에 웅성웅성하고 몸싸움이 일어나고 노원교회 교인들과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부터 평직원이 떼거리가 되어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저는 예배 설교 단상에서 내려가 112에 전화를 걸어 경찰을 오라고 해서 협회 국장과 부장, 과장, 여직원까지 노원교회 교회에서 밖으로 다 끌어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통일교가 망신당하는 것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는 주일 예배 때 어떻게 설교를 하고 끝마쳤는지 모릅니다 재직 회장과 부인 회장, 충성했던 변함숙 권사 등 전체 식구들과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 이하 협회 직원들과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통일교는 조직이 있었기에 통일교 이인자인 김승철 국장과 국장단, 전 직원들 앞에 노원교회 교인들은 원통하고 분하지만 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을 중심으로 문성숙, 고귀숙, 최인자 등은 그 동안에 교회 발전을 가로막고 암적인 역사를 했습니다. 저를 불신하며 김승철 국장과 합세했던 몇 명의 교인들까지 총동원하여 김승철 총무국장은 밀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 교회에서 충성했던 이수성 집사(1970년 합동 결혼식자-777쌍)도 그 자리에서 의리를 저 버리고 저를 배신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구장으로는 김승철 총무국장의 동서인 나상렬 목사(1962년도 72쌍 결혼식자)가 교구장으로 왔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 부인과 나상련 목사 부인은 같은 자매였던 것입니다. 치욕적인 수치와참을 수 없는 분노의 날이었습니다. 이런 악연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가증스러운 죄악의 역사 앞에 저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고 한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김영휘 회장이 1990년 11월 26일날, 문선명 통일 교주의 명령으로 한국통일교 협회 회장직에서 사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임으로는 일화 홍성표 사장이 취임을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1970년부터 1990년 11월 26일까지 전국 통일교 목회자들의 형님이었고, 아버지 같이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의 심정과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 이였습니다. 김 영휘 회장님은 중간에 잠시 회장직에서 물러났을 뿐 저는 거의 전부를 김 영휘 협회장을 모시고 목회를 하였습니다. 저는 1991년 1월 13일 홍성표 협회장을 제외한 김승철 총무국장과 각 국장들, 부장, 여직원까지 시위를 벌리며 밀고 들어왔을 때 저는 몇 마디만 하고 2층 사택으로 내려왔습니다. 제 자신이 무력하고 힘이 없는 목회자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껴야 했습니다. 3층에서는 김승철 국장이 노원교회 교인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교인들에게 온갖 말로 변명만 늘어놓았습니다.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의 감언이설에 속은 노원교회 교인 중 저의 은혜와 사랑을 배반한 몇몇 교인이저에게 직접 시위를 벌렸습니다. 2층 사택의 안방 안에서 3일 동안이나 문을 걸어 잠그고 온갖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노원교회의 이수성 집사였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1970년 777쌍 합동 결혼식자인데, 잠시 목회도 하였던 사람입니다. 한쪽 팔을 못 쓰는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후 두 아들을 낳고 아내는 사망하였습니다. 혼자두 아들을 키우며 사는 것을 저는 안타깝게 생각하고 노원교회 어떤 통일교 교인들보다도 불쌍히 보고 긍흘하게 보는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충성하라고 장년 회장 직책까지 임명하였습니다. 저는 이수성 집사의 두 아들을 위하여 자주 심방하였습니다. 갈 때마다 먹을 것을 사다 주었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화물차 한 대로 짐을 실어 나르는 영업을 하였습니다. 이수성 집사가 집에 없을 때도 두 아들을 위해 저는 심방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수성은 저의 은혜와 사랑을 저버리고 김승철 국장과 단번에 짝이 되었습니다. 재직회장, 부인회장, 전 교인이 김승철 총무국장에 대하여 분노하는데 오직 장년 회장인 이수성 집사 혼자만 김승철 총무국장편에 서서 은혜를 배반하는 행위를 하였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목사 사택인 저의 안방으로 들어가 3일 동안을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를 보고 목사라고 하지도 않고 "너는이제 노원교회 목사가 아니다. 노원교회 목사는 나상렬 교구장이다(김승철총무국장 동서 - 1962년 72가정 합동 결혼식자). 박준철, 너는 노원교회에서 나가라" 고 하면서 시위를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그 당시의 충격으로 통일교를 떠나버렸습니다. 저의 가족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눈물로 3일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의 부부는 안방에서 못 자고 이불도 없이 마루에서 추운 겨울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악몽같고 지옥 같은 통일교의 목사 길을 극기 훈련하는 심정으로 인내하고 문선명 교주를 믿으며 충성하고 살아온 날들이 한없이 후회되었습니다. 저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가정국장의 폭행과 인사비리 부정에 대한 쇼크로 심장병을 얻었으며 간을 너무나 못쓰게 되고 과도한 스트레스로 담석증을 얻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위장병도 얻고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사이비 종교 중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종교 같이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잔인하게 인사 부정을 하고 자르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목사와 회사 직원들이 아내, 자녀들이 있고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는데도,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그룹 내 기업체 통일교 교인들의 회사 직책을 하루아침에 박탈시켜 버립니다. 손바닥 뒤집듯 칼로 생선을 자르듯 목사 직책과 기업체 직책을 박탈하는 살인적인 행위를 생각하니 치가 떨립니다. 저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로부터 잔인한 인사와 간부들에게 폭력 및 폭행을 당하며 언제 심장병으로 쓰러져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문선명 가짜 재림주에게 미쳐 있었습니다. 제 2절 나상렬 노원교구장의 배신 저는 폭력과 폭행 앞에 항변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제 목숨을 바쳤던 노원교구 본부를 피눈물을 흘리며 떠나야 했습니다. 저는 목회 의욕을 잃어버렸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자주 충격을 받고 폭행을 당하여 실어증과 심장병, 불면증 합병증으로 지금 현재까지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곤란할 때마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심장병으로 죽으면 억울해서 영계에 어떻게 가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현실 앞에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상렬 교구장에게 당분간 노원교회 목사 사택에 살면서 빠른 시일 내에 노원교구 관할인 공릉동 교회로 가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사짐은 지하실 창고에 쌓아 놓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나상렬 노원 교구장은 대 선배 목사로서 항상 좋은 자리만 차지했기 때문에 강남에 좋은 저택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그런 나상렬 교구장은 강남 집에서 노원교회로 출퇴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나상렬 노원교구장과 약속한대로 노원교회에 잠시 생활했습니다만,나상렬 교구장은 온갖 방해와 여러가지 압력을 행사 하였습니다. 결국에는 나가라고 하는 소리까지 하였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나가겠다고 하였는데도 나상렬은 김승철국장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노원교회 교인들을 동원하여 차마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저에게 하였습니다. 저는 나상렬 교구장의악 랄한 처사에 못견뎌 눈물로 공릉동 2층 전세 교회 내에 있는 합판으로 만든작은 방 2칸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셔서 제가 죽을 때까지 노원교회에 교구장으로 있을줄 알고 사준 장롱, 화장대, 장식장 등 온갖 가구들은 공기도 통하지 않는 지하실창고에 다른 이사짐과 함께 쌓아 놓았습니다. 곰팡이가 피고 습기가 차 못쓰게 된 가구와 옷,책은 제가 1년 후 이사를 할 때 버려야 했습니다. 저를 불신한 통일교 교인들은 힘 있는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달라붙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노원교회교인들에게 김승철 국장은 그 국장자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은 7개월 만인 1991년 8월 30일에 문선명으로부터 총무국장직을 박탈당하였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은그 후 몇 년 동안 일본의 통일교 선교사 일을 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망하였습니다. 제 3 절 공릉동 교회의 지옥같은 생활 공릉동 교회는 노원교회보다 건물이나 재적인원, 예배인원, 헌금 등이 2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10여명의 통일교 교인이 있는 개척교회의 목사로서 시무해야 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거지 목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억울한 일들 때문에 심장병을 얻어 모든 의욕을 잃어 버리고 눈물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도 불안과 공포 속에서 지냈습니다. 마음이 너무나 아팠고 괴로움의 나날이었습니다. 가정 분위기는 초상집과 같이 침울하였고 제 자신은 그 동안에 통일교에서 당한 한을 풀 길이 없어 강팍해져 버렸습니다. 제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형님같이 저를 이끌어 주셨던 K교구장님이 있었습니다. K교구장님은 자신이 통일교 대 선배 축복 가정 목사였는데도 뺨을 맞고 폭력을 당했다고 하며 제가 폭행을 당한 것을위로해 주었습니다. 유지철 목사도 1981년도 10월 20일, 서울 시내 선배 목사 동원령이 내렸을때 후배 목사인 최정철 목사에게 나무 몽둥이로 무차별적 인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최목사는 피와 땀으로 교회를 개척하여 전세 교회를 마련 하였는데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후임 목사인 유지철 선배 목사에 자기 교회를 빼앗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정철 목사는 나무 몽둥이로 폭력을 행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정철 목사는 능력 있고 교회를 잘 부흥시키는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문선명 교주가 환멸과거짓, 재림 주라는 것을 알고 통일교를 탈퇴하였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나가서 사업에 성공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1991년 2월 3일 노원교구 관내인 공릉동 통일교에 취임을 하였습니다. 그 동안 공릉동교회는 비참하고 어려워 목사가 없었습니다. 이 무슨 역사인지 제 목숨을 바쳤던 노원교구 본부교회를 멀리 떠나지 못하고 노원교구 본부교회 지시를 받아야 되는 공릉동 개척교회로 취임식을 해야 했습니다. 매달 월말 회의를 노원교구 본부로 가서 해야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를 빼앗겼는데 그 곳으로 매달 회의를 가야했습니다. 저는 매달 목사들 월말회의 때가 회의시간이 아니라 고문하는 시간 같았습니다. 월말 목사들 회의시간이 지옥 같았고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헌금이 없기 때문에 생활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교인이 아닌 세상 사람이 가끔씩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단 10원의 생활비도 지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녀 교육과 생활을할 수가 없어 아내가 파출부일과 식당일을 계속하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공릉동 개척 통일교로 취임을 한 후, 하루아침에 생활과 재정이 파탄 되었습니다. 노원교회 재직 회장이었던 윤승운 장로와 부인 회장 최선례 집사,노원교회의 정신적인 어머니였던 변함상 권사, 저의 동생들이 노원교회를떠나 공릉동교 회로 옮겨 저를 도왔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을 가지고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심장병과 육신의 병으로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육신의 병도 문제지만 제 영혼의 아픔과 배신감 때문에 목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제 17장 전국 통일교 목사전체 500명의 박탈당한 목사직
제 1절 교회사택에서 쫓겨난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
전국 통일교를 1991년 8월 30일부로 모두 폐쇄하고 해산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통일그룹 내, 통일교 합동 결혼식 한 교인은 무조건 통일교 회사에서 퇴사하고 자기 고향에 돌아가 친척들을 전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통일교 교인이나 세상 회사에 다니는 통일교 교인들도 폐업과 퇴사를하고 고향으로 돌아 가라고 문선명 교주가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그룹 내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통일교 교인들을 강제적으로 퇴사를 시켜구조조정을 한 것이었습니다. 통일교 회사를 살리고자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만 근본적인 회사경영의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통일그룹이 IMF때 부도를 내고 파산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을 박탈당한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교 회사에 다니던 통일교 교인들은 강제 퇴직을 당하여 대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은 불안과 공포, 방황 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더불어 당장 먹고 살 곳이 없었습니다. 목사들은 통일교에서 쫓겨나 거리에 내몰렸습니다 졸지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데 갑작스런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목사직 박탈이 되어 처절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목사들에게 목사 경력에 따라 돈을 지급해 주었습니다. 통일교 목사 생활 1~5년을 한 목사는 100만원, 5~10년 목사 생활을 한목사는 300만원, 10~15년 목사생활을 한 목사는 300만원, 15년 이상 목사생활을 한 목사는 400만원씩을 지급하였습니다. 서울 시내 5인 가족이 방3칸 정도의 전세방을 얻으려고 하여도 5천 만원 이상을 주어야 전세를 얻을수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언제나 교회 사택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집이 필요 없었습니다. 통일교목사들은 언제나 처절하게 가난하게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아 놓은 돈도 없었습니다. 매 주일마다 나오는 헌금으로 자녀 교육비와 가정생활 하기도 벅찼습니다. 문선명은 그런 통일교 목사 500명을 졸지에 갈 곳도 없이 교회에서 쫓아내고 엄청난 충격를 주었습니다. 전국 통일교를 폐쇄하고 해산한다고공문으로 전국 통일교와 교인들에게 명령을 시달했습니다. 그러고는 1달만에 전국 통일교를 해산하지 않고 폐쇄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전국 통일교와 교인들에게 공문으로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선명 교주는 위선과 거짓으로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속인 것이었습니다 전국 통일교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 큰아들인 문효진 9세 재림주 체제를 만들기 위하여 문선명 교주와 홍성표 협회장이 현직 목회자들의직책을 박탈시켰던 것입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통일그룹 내 기업체 살리기위 한 작전으로 통일교 교인들을 잘라 낸 것이었습니다. 회사 구조조정과 경영개선을 하려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이 나이가 많고 교회 부흥은 안 시키고 적당주의, 형식주의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70세가 넘는 고령이어서 자식인 문효진을 자신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로 세우려고 작전을 한 것이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이 문선명의 큰아들이며 홍성표 협회장의 첫 번째 사위인 문효진 체제를 만들고자 문선명과 한 짓 이었습니다. 문선명은 홍성표 협회장과 같이 통일교 해산 1달후문효진이 마음대로 명령하고 지시할 수 있도록 젊은 목사체제로 구축하였습니다. 저보다 7년 늦게 합동결혼식을 한 1982년도 6,000쌍 합동 결혼식을 한 젊은 사람만 통일교 목사직을 수행할 수 있게 했습니다. 1982년도 이후 합동 결혼식자인 어린 목사들을 전국 통일교에 목사로 발령했습니다. 문선명은 젊은 통일교 목사들을 모아놓고, 나이 많은 전 통일교 목사들을 멱살잡이를 해서라도 전국 통일교 사택에서 끌어내 쫓아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교주는1991년 1월에 "젊은 통일교 목사들이 힘을 두었다가 어디다 쓸 것이냐?" 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전세금도 자녀 교육비도 집도 없어 당장 갈 곳이 없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당한 나이 많은 통일교 목사들은 젊은 목사 눈치를 보며 한 교회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나이 많은 40대 통일교 목사들은 20대, 30대 젊은 통일교 목사들에게 온갖 모욕과 무시를 당하며 생지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자기 교회의 교인들까지도 전임 목사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전국의 통일교에서 전임목사와 후임 젊은 목사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문선명에게 하루살이 같이 일생 동안 충성하고 이용물이 되어 목사직에서 박탈당한 후 자신의 고향에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통일교 기업체에서 직책을 박탈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난 통일교 교인도 이사 짐을 싸서 고향에 갈 수 없었습니다. 고향은 커녕 통일교에서 쫓겨난 목사들과 통일교 회사에서 쫓겨난 통일교 교인들은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했습니다. 배운 것도 기술도 경험도 없었습니다. 당장 아내와 자녀들은 굶주려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몇몇 통일교 목사들은 빛을 내고 있는 돈을 모아 식당을 했지만 대부분 망해 버렸습니다. 가게를 해도 경험이 없어 실패를 하는 목회자도 있었습니다. 돈이 없는 통일교 목사들은 지하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고 건설 현장에서 벽돌과 시멘트일, 도배일, 온갖 막노동을 하였습니다. 어떤 통일교 목사들은 목사직 박탈 후 다단계 판매 사업을 하여 빚더미에 올라 앉았습니다. 여러 명의 목사들이 다단계 금융 사기에 걸려들어 거액을 날리고 다단계 금융사기죄로 전과자가 되어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 당한 통일교 목사들은 문선명 한 사람의 죄악으로 졸지에 한참 정상에 서야되는 40대. 50대에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거지가 되며 전과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도처에서 목사직을 박탈당한 목사 가족들이 단칸 지하셋방에서 3대가 같이 살아야 하는 비극적 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당한 목사의 아내는 파출부로 신문배달로 식당 종업원으로 막노동 일로 생선장사로 보험 모집원으로 이 세상에 밑바닥 일을 했습니다. 처참하고 가난하며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2 절 7개월만에 박탈당한 500명의 목사들 1991년 9월 1일부터 전국의 통일교 목사 500명과 통일교 회사에서 퇴사한 통일교 교인들과 자영업을하는 통일교 교인은 종족적인 메시아 역할을 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본래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집을 매도하고 전세금을 빼고 하여 완전히 고향으로 이사를 가라는것이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명령 이었습니다. 생업이나 회사생활. 자녀교육은 문선명 교주에게 안중에도 없는 일입니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문선명 사이비 교주만이 그런 공포의 명령을 내릴 수가 있는것입니다. 저도 노원교구 내 공릉동 통일교에서 전국 통일교 목사들과 같이 목사직을 박탁 당하였습니다 .선배통일교 목사들은 "박준철 목사는 통일교에 최고 충성하고도_그렇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고 폭헹을 당했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 ?"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 형제, 친척과 고향 동네 사람들에게 문안인사를 드렸습니다. 경남 하동 고향 땅에 가 고인이 되신 아버닐과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하동 교회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 도착 신청서를 제출하였슴니 다. 그리고 어머님을 뵙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통일교는 모든 교회 일 처리가 명령만 있고 형식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언제나 행사로 시작해서 행사로 끝나버리는 것이 통일교의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47여 년을 통일교는 내실 없이 형식에 치우친 행사만 하였습니다. 경날 하동 고향에 갔던 것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 목사 직분을 박탈당한 목사들은 고향에 있는 통일교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 신청서를 내야 문선명 교주에게 순종했다는 표시가 되기 때문 이었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에서 박탈당한 목사들에게 2~3개월 생활비밖에 되지 않는 1백~4백만원을 퇴직금이라고 주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것이라도 받아와야 당장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고향에 다녀왔던 것 입니다. 저는 공릉동 통일교에 합판으로 방 3칸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빼앗겨야 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교회 책임자로 처녀 전도사가 왔습니다. 저는 양해를 구하고 겨울을 나고 이사 가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저는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지만 영혼과 육체가 폐인이 되었고 심장병으로 막노동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의 아내는 아침부터 밤까지 파출부 일과 식당 일을 했습니다. 참으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무력한 모습을 아내나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엄동설한과 더불어 제 마음은 더 혹독한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 3 절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독서실 운영
통일교 목사직을 그만둔 후 첫 사업이었는데 잘못 계약한 것 이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정릉에 있는 고명상고 옆 대원독서실을 계약하고 인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수후 한달만에 재개발 지역이 되어 미아리 고개와 아리랑고개 사이에 있는 집들이 철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독서실을 소개하는 전문 부동산 업자도 저를 속였던 것입니다. 독서실 주위에 한 쪽 부분만 철거가 되지 않고 주위 전체가 다 철거를 하고 아파트를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년 동안 대원 독서실을 운영했는데 전 가족들이 매달려 고생만 하였습니다. 그나마 철저하게 독서실을관 리하고 운영한다는 소문이 나서 현상유지는 할 수 있었습니다. 대원 독서실을 1년 동안 팔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천지에는 저 같은 바보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대원독서실을 폐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증금은 건물주인에게 받았지만 시설비 2천5백만원은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다 날렸습니다. 선풍기 5천원, TV 5천원, 냉장고 1만원, 자판기 3만원을 받고 고물 장사에게 팔고 독서실 의자와 책상은 중고 물품 취급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돈을 주고 철거해야 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교문으로 나오면 학생들을 차에 태워 독서실까지 데려와 공부를 시키고 새벽 2시에 학생들을 집에까지 실어다 주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학습분위기 조성, 청소 등 너무나 힘든 일 이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목사생활을 할 때처럼 정신적인 충격과 스트레스 등이 없었기 때문에 독서실 운영하는 것이 마음은 훨씬 편했습니다. 1년 동안의 대원독서실의 운영은 제가 2번째 속아서 계약하여 2번째로 독서실운영의 피해를 본 것이었습니다. 사회 경험이 없는 저는 또 한 번의 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제 4 절 고시원 운영 중 다시 꿈꾸게 된 목회 길 저는 싸고 낡은 고대 옆 고시원을 인수하였습니다. 고시원은 대학생 중심으로 한 생활이기 때문에 밤마다 독서실에서 처럼 중 고등학교 학생들 같이 차로 집에 데려다 주지 않아서 조금 편했습니다. 지옥 같은 공릉동 통일교를 떠나 고시원 옆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 동안에 한푼 두푼 적금을 붓고 은행에 예금하고 모은 돈과 상계동 무허가 집을 팔은 돈으로 고시원을 인수하고 집도 전세로 얻었습니다. 고시원 학생들의 식사도 해 주었습니다. 고시원 시설은 낡았지만 대학 내에 저희 고시원에서 시험을 보면 무슨 시험이든지 합격이 잘 된다는소문이 퍼져 많을 때는 60명이 넘어 고시원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I~2년 운영 후 주위에 점점 최신식 고시원이 들어서고 원룸 고시원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저희 고시원은 저희 부부 인건비 정도 수익이 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시, 행시, CPA, 취직시험, 각종 공무원 시험을 치는 학생들에게 아버지 같고 형님 같이 대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그 낡은 고시원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용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각종시험에 합격되었다고 할 때마다 고시원 원장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습니다. 제가 고시원에서 한 학생, 한 학생을 놓고 기도 하다 보니 각종 시험에 합격을 잘하였던 것입니다. 학생들은 저희 고시원은 행운이 따르는 고시원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고시원 운영 중 임순도 종로 교구장 겸 통일교 부협회장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의 통일교 충성과 저의 사명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분 이셨습니다. 임순도 부협회장이 계실 때 제가 서울 강서 교구 본부 교회를 허허벌판에서 개척하고 교회를 부흥시켜 교회 건축을 하고 하나님께 봉헌하는 헌당식도 못한 사실을 임 교구장은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배 통일교 목사에게 눈물로 양보했던 서울 강서 교구 본부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서울 강서 교구 본부 목사로 저를 발령을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고난과 눈물, 충성, 한국 최고의 목사로서 실적을 잘 알고 있었던 임순도 부 협회장님은 저를 서울 강서교회 목사로추천해 발령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동안의 억울함,부정 인사이동, 언제나 통일교 선배 목사에게 양보하고 온갖 폭행과 폭력을 당하며 그 충격으로 심장병 ·담석증 ·위장장애 ·불면증까지 겹쳐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저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하루 하루를 살고 있으면서도 마지막으로 제가 땀과 눈물로 교회 건축을한 강서 교구본부에서 마지막 목회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된 통일교 목사로 지옥 같은 통일교 목사 생활을 했으면서도 통일교 목사직을 또 소망했습니다. 제 자신이 정신 이상자가아니고서는 어찌 문선명 교주의 쇠사슬에 코를 끼려고 했겠습니까? 저는 너무나 세뇌되어 다시 통일교 목사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소망을 갖고 제가 운영하는 고시원을 매매한다고 바로 광고를 내었습니다. 고시원만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부동산 회사에서 즉각 저의 고시원을 팔아주었습니다. 너무나도 문선명 교주에게 빠져있었던 저는 제 사명이 목사이기 때문에 목회를 해야 한다고 다른 길은 저에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때 고시원을 매도하였던 것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고시원 정리 후 임순도 부협회장과 변함숙 권사를 만나 함께 곽정환 협회장을 찾아갔습니다. 임부회장은 박준철 목사가 서울 강서교구를 개척하여 발전시켜 강서교구 본부를 건축하였는데 헌당식도 못하고 선배 통일교 목사 때문에 강제 인사이동이 된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곽회장은 고향인 경상남도로 가서 목회활동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목사 활동을 해야 한다고 거절했습니다. 곽정환 회장에게 1년 전에도 변함숙 권사님과 함께 곽정환 회장집을 방문하여 서울 강서교회 목사로 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제가 노원교회의 변함숙 권사와 함께 곽정환 회장을 만난 것은 서로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변함숙 권사는 통일교를 초창기에 나오신 분으로 통일교가 이단교회라고 남편이 핍박하고 마침내 이혼까지 당하고 외동딸과 같이 다녔습니다. 문선명은 변권사에게 "변권사는 이름대로 변함없이 참 부모님을 영원히 믿고 충성하는 신앙자이기 때문에 나도 기억하고 있다" 고 하며 칭찬도 하였습니다. 변권사는 문선명의 교주 옷을 만들었고 외동딸은 통일교 합동 결흔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통일교 사업으로 꽃을 팔며 전도를 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일생 동안 재혼도 하지 않고 외동딸을 키워 통일교 합동 결혼식까지 시켜 놓았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 때문에 사랑하는 외동딸이 전도와 꽃팔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변함숙 권사님은 찢어지는 마음과 충격으로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장례를 치른 후 변함숙 권사님의 딸은 교통사고 피해자였기 때문에 소송을 하려고 했습니다. 가해자는 미국 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통일교 협회에서는 소송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 전도하고 꽃팔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인데 소송을 걸게되면 문선명 교주와 통일교가 미국 사회에서 명예가 훼손된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가 망신을 당한다고 손해배상 소송을 걸지 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교주와 통일교 협회에서는 변함숙 권사님의 외동딸의 교통사고 보상과 위로금을 단 10원도 주지 않았습니다. 변함숙 권사님은 일생동안 문선명 재림주만 믿고 충성하고 순종하며 직업이라고는 가져보지 않았습니다. 사이비교에 다닌다고 남편에게 이혼 당할 때 위자료로 받은 큰집을 팔아서 일생동안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변함숙 권사가 남편과 이혼하고 외동딸과 살 때 변권사님 집에서 3년 동안을 함께 생활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곽 회장님을 만나 억울한 사정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차디차고 냉정한 곽정환 회장은 통일교 최고의 회장자리에 있어서 그런지 저 같은 목사의 말은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통일교 초창기 때는 목회를 조금 했지만 1970년 이후부터 세계 대학생 선교 본부장을 했기 때문에 목회자들과 저는 곽정환 회장을 잘 몰랐습니다. 문선명 교주 세 번 째 아들인 문현진과 곽정환 협회장 딸인 곽정숙은 결혼하였습니다. 큰아들인 문효진은 방탕과 마약, 이혼파경 등으로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둘째 아들인 문흥진은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문교주가 살아있는 처녀와 영혼 결혼시켜 놓고, 죽은 문흥진을 천국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21세기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통일교 집단에서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죽은 문흥진이 재림했다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세뇌시키기도 합니다. 세 번째 아들인 문현진이 문선명 교주의 후계자가 되어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곽정환 회장은 홍성표 협회장이 자기 사위를 후계자로 세워서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던 것과 같이 자기 사위인 문현진을 후계자로 세웠습니다. 그 문현진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또다시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하여 무자비하게 목사직을 박탈하였습니다. 2000년 9월 18일 세계일보 국제 연수원에서 벌어진 대 사건이 었습니다. 2000년 4월 30일에는 문현진이 통일교 세계 대학생 회장으로 취임을 하였고 전 세계 통일교 부회장 직책까지 갖고 문선명 교주의 지시에 의해 대를 이어 전세계 통일교를 이끌고자 동분서주 하고 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문선명 교주의 명령에 의하여 세계일보 부 회장직에서 박탈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선명 교주의 후계자인 자기 사위 문현진과 문선명 교주의 부인 한학자를 내세워 모든 실권을 거머쥐었습니다. 곽회장이 문선명 교주로부터 세계일보 부회장직에서도 박탈되었지만 한학자가 문선명 교주의 사후를 생각하라며 강력하게 곽정환 회장을 복직시키라고 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을 다시 세계 일보 부회장으로 임명하라고 남편인 문선명 교주에게 강력하게 주장하여 한학자의 힘에 의해 곽회장은 이틀만에 세계 일보 부회장으로 복직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이 한국에 없을 때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 통일교 회사 사장단은 곽정환 회장의 명령과 지시를 받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사망하였을 때를 대비하여 곽정환 회장을 통일그룹 총 회장으로 세웠습니다.
제 18 장 부산 영도교회
제 1 절 부산 영도 통일교로 인사발령 저는 서울 고시원을 정리한 후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로 많은 돈을 쓰게 되었습니다. 서울 강서교회로 가는 것으로 알고 고시원을 정리 하였던 것인데 시간이 지난 후 제가 또 큰 실수 한 것을 알았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이었던 고시원을 팔고 보니 잘못 결정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남의 고시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이 저를 "출신지인 경상남도에 가서 목사 생활을 하고 오라"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고향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가 되어 가정집에서라도 친척들을 불러 모아놓고 통일교 교인들로 만들어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 문선명의 명령 이었습니다. 무슨 빽으로,무슨 부정이 있었는지 저는 알수 없지만 통일교식 법을 지키지 않고 고향에 가지 않고도 서울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만 고향 교회에 가서 목사 생활을 하고 오라는 것 이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저보고 고향에 다녀오라는 말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임순도 부 협회장님도 저보고 잠시만 부산 목회를 하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심장병이 있어서 고려대학 병원에 수 차례 가서 심장, 간, 담석증, 위장, 불면증 등으로 수술과 입원치료를 받았고 집에서 고려대학 병원까지 차로 실려간 해도 있었습니다. 가족들끼리 같이 살아도 힘들었는데 혼자 부산 영도에 가서 제 육신의 병고를 안고 거센 바닷바람과 싸우며 살아야 했습니다. 저는 부산에 곽정환 회장이나 임순도 부 협회장이 고향에 다녀왔다는 조건만 세우면 바로 서울 강서교회 목사나 노원교회 목사로 올라오는 것으로 믿고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취임을 하였습니다. 말이 영도 통일교 취임식이지, 영도 통일교 교인은 제가 갔을 때 실제로 2가정 밖에 없었습니다. 헌금은 교회 운영하는 공과금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부산 통일교 내에서 제일 최하위 교회인 부산 영도 통일교로 저를 추천하여 공문을 올렸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데 1996년 2월 28일날 협회 임종호 총무국장이 저에게 전화를 하여 "부산 정성호 교구장의 전화가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임종호 총무국장은 제가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발령이 났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부산 영도교회 수준이 어떠냐고 임종호 총무국장에게 물었습니다. 임종호 총무국장은 통일교가 어느 곳이나 가난하고 어렵듯이 부산 영도 통일교도 어려우니까 담임 목사가 없는 교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너무나 많은 고통과 가난, 시련에 생지옥과 같은 목회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먼저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시무하라는 말을 임종호 총무국장으로부터 듣기 전에 꿈에서 제가 큰 다리를 건너간 후 예배를 드리려고 몇명이 앉아 있는 광경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예배 장소가 쓰레기와 대변으로 가득 찬 교회였습니다. 저는 꿈에서 그 몇 사람과 쓰레기와 대변을 깨끗이 다 치웠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이 앉아 예배를 드렸는데 나중에는 그 예배 장소가 교인들로 가득 찬 꿈을 꾸었습니다. 꿈을 깨고 바로 다음날 협회 임종호 총무국장으로부터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저를 발령하였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꿈에 보여준 대로 부산 영도라는 곳은 영도다리를 건너가야 하는 섬입니다. 영도교회는 총각 목사도 못하겠다고 도망을 쳐버린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런 곳에 저를 발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의 뜻이 영도교회에 가라는 것이구나! 영도교회 교인 몇 사람을 데리고 교회를 발전시키라는 것이구나!' 라는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부산에는 교인은 많고 교세가 크고 안정된 통일교가 많았습니다. 저보다 합동결혼식을 7~17년을 늦게 한 어린 후배 목사들이 안정된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혀서 더 이상 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 했는데 부산 영도교회 목사로 부임하고 보니 자부심과 긍지는 또 한번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통일교 목사 생활로 문선명 교주에게 죽도록 충성한 것을 생각하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러운 마음이 울컥하고 올라왔습니다. 저는 부산 영도 태종대 절벽바위 위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영도교회는 예배 장소만 있는 교회였습니다. 예배 인원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이고 교인들 헌금도 교회 관리비, 운영비를 하면 꼭 맞는 액수였습니다. 목사 생활비는 꿈도 꿀 수 없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세뇌되어 끌려가면서 하나님이 저를 필요로 하고 영도교회가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으로 알고 결단을 한 후 영도교회에 취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1996년 3월 10일에 서울에 가족들을 두고 홀로 부산 영도교회로 가서 자취생활을 하며 목사로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심장병과 만병을 갖고서 옛날 조선시대에 간신들의 모함에 의해 충신들이 귀양갔던 영도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이 영도 섬에서 제가 살아서 서울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첫 기도를 하였습니다. 20년을 서울에서만 목사 활동을 하였는데 우리 나라 남단 부산 지방 영도 섬에 와서 목회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제 이름은 호적에 박준기 라고 되어있습니다. 불꽃 '준' 에,구부러진 낭떠러지 '기' 자 입니다. 뜻을 말씀 드리면 제가 불꽃같이 성공하여 구부러진 낭떠러지에서 항상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열차, 절벽, 나무에서 떨어졌었고, 교통사고로 육신의 팔을 잃어버렸고, 목회에 성공하면 강제 부당 인사이동으로 빼앗기는 아픈 세월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고쳐주셨고 열국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래도 사라(공주)로 고쳐주셨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을 생각하고 박준기를 버리고 박준철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박준철 목사는 교회 건물만 있으면 교회를 부흥발전 시킬 줄 알고 인사발령을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오랜 시간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들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수택리 연수원에서 전국 통일교 목회자 교육을 하고 난 후 저에게 협회 국장들 앞에서 "부산 영도교회에 가서 성공하고 올라오라","잘 다녀 오라" 고 5번이나 당부하였습니다. 임순도 부협회장도 "부산에 잠시 다녀 오라" 고 하였습니다. 저는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처음부터 100일 기도, 전도, 심방 등 정말 밤낮 없이 교회 발전을 위해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로 이적이 일어나고 매 주일마다 새로운 교인들이 입교하여 순식간에 교회가 부흥 되었습니다. 부산 영도 통일교를 목사님도 없이 지키고 있었던 2가정이 있었습니다. 이진상, 하진희 순회사님 가정과 이광철, 이상희 부인회장님 가정으로 2가정이 저의 손발이 되어 죽도록 충성 하셨기에 교회를 부흥 발전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영도구 봉래동(지금현재 봉래 목욕탕 자리)에 신상진, 유신선 부부집에서 문선명이 교회 간판도 없이 방안에서 부흥 집회를 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1953년 12월 24일에서 1954년 1월 14일까지 21일간 문선명 통일교 재림주는 부흥 집회를 밤낮으로 열정을 가지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원리강론을 정리하고 집필하였던 유원효 통일교 2대 협회장 유민효, 유영효, 송도욱장로(문선명 참부모 3대 비서실장), 신상진 유신선 부부, 김영희(여자,Y대학생, 문선명과 김영희는 SEX교리로 혈통 복귀하여 문희진 출생) 등이통일교 문선명 교주 부흥집회에서 통일교에 입교하였습니다. 그들은 최고로 충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통일교에 최고로 충성했던 교인들이 영도교회를 떠난 후 영도 통일교는 폐허가 되었고 47년이 된 영도 통일교는 중간에 폐쇄되는 때가 많았습니다. 많은 통일교 목회자들이 영도 통일교에서 노력했지만 좋은 결과가 없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부산 시내에서 사업이나 장사에 실패하여 방세가 싼 영도 섬에 와서 잠시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이나 영도 통일교인은 영도 섬에서 살다가 부산 시내에 방 한 칸만 얻을 수 있는 돈만 되면 영도 섬을 떠나 부산 시내로 이사를 갔습니다. 제가 서울 노원 교구본부 철거민 달동네에서 개척할 때도 사업에 실패하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시내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상계동에 와서 살다가 돈을 조금 모으면 교통 좋은 시내로 이사를 가버리곤 했습니다. 서울 노원교회와 같이 영도 통일교도 온갖 정성으로 교인을 만들어 놓으면 이사를 가버리기 때문에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도 통일교에서 모든 악조건을 물리치고 3월 첫 달부터 순식간에 '일요일 예배드리는 교인 2배가 운동' 을 달성하여 교회가 부흥 발전을 하였습니다. 하진희 영도구 통일교 여성연합회장과 이상희 영도 통일교 부인회장과같이 하진희 회장님 자가용을 타고 매일 새벽 1시까지 말씀과 기도하며 전도하였습니다. 하진희 회장님은 사업을 하시는데 시간을 교회 발전에 전부를 투자하셨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님도 야구르트 배달을 하면서 영도구 야구르트 배달원 친목회장과 총무, 서기 등 많은 사람을 통일교 교인으로 전도하였습니 다. 제 2 절 부산 영도교회 부흥 발전 영도통일교는 지금까지 막다른 골목 안에 갇혀 있는 교회였습니다. 영도교회의 47년의 역사 속에서 사명감과 주인의식으로 사력을 다하여 목사생활을 했던 목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영도교회는 47년 동안 단 한 사람의 사명감 있는 통일교 목사가 시무하지 않았기 때문에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던 것입니다. 영도 통일교에 길이 좁아서 자동차가 한 대도 들어 올 수가 없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수시로 불법주차 스티커를 받아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저는 교회의 콘크리트 기둥과 이중 대문을 전부 헐어 내어 교인들의 차를 교회 안까지 진입시킬 수 있게 대공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교회와 내부에 페인트칠을 하였습니다. 외부 페인트칠도 영도 통일교 교회 건축 16년만에 처음으로 하였습니다. 화단을 다시 만들고 문 전체를 수리하고 지하실과 창고마다 가득가득 쌓인 쓰레기를 전부 밖으로 끌어내 10 리어카 정도 되는 많은 양을 폐기 처분하였습니다. 제가 영도 통일교에 오기 전에 꿈에 본 그대로 영도 통일교는 쓰레기장 이었습니다. 창문 하나 하나마다 저의 정성을 들여야 했습니다. 그 동안 영도통일교는 독 안에 든 것같이 앞에 2층, 3충 집들이 가로 막혀 공기가 통하지 않고 사각형 안에 갇혀 있어서 도둑을 맞을 때가 많았습니다. 제가 영도교회에 시무하면서도 몇 차례 도둑이 들었습니다. 저는 도둑을 잡아서 교육하고 돌려보낸 때도 있고 파출소에 인계하여 부모형제를 불러 집으로 보낸 때도 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교회 안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막혀 있었습니다. 제가 영도교회로 가고 나서 영도와 육지의 새 다리가 만들어진다는 계획 때문에 교회 앞의 2~3층 주택 전체가 헐리게 되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8차선 도로에서도 보이게 시야가 확 트였습니다. 멀리서 보고도 영도 통일교를 알 수 있도록 새로 페인트칠을 하고 교회간판을 달았습니다. 옆의 주택은 도로 보상비를 평당 300만원씩을 받았는데 영도교회의 땅 10평은 도로라는 지목으로 평당 100만원밖에 주지 않갰다고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개인 땅이었는데, 통일교 협회에서나 과거 이곳의 목사는 도로가 만들어 질 때 개인 땅이라고 서류를 만들어 놓지 않고 교회 출입구를 도로라고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보상을 100만원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협회와 통일교 중앙 재단 본부에서는 저에게 지금까지 통일교 대지가 도로로 편입된 것을 재판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보상을 더 받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도로로 된 대지는 보상가격의 3분의 1밖에 받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에서는 2~3일 후에 영도 통일교 대지 10평의 보상 가격 1천만 원을 재단본부에서 받을 것이라고 저에게 통보해 왔습니다. 재단본부와 통일교 협회에서는 저에게 영도 통일교 도로 편입 보상을 관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단돈 100만원이라도 주인 정신을 갖고 노력하여 보상을 더 받아 보겠다고 협회와 재단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협회와 재단은 저에게 손을 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부터 사명의식과 주인정신을 가지고 보상을 더 받기 위해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갖추려고 동사무실과 구청을 뛰어 다녔습니다. 협회에서 통일교 대지를 관리하는 사람이나 재단 본부의 교회 대지 보상책임을 맡은 사람에게 저는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고자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습니다. 사진을 찍고 서류를 꾸며 구청과 과천 종합 청사에 서류를 보내고 하여 다시 감정을 받았습니다. 영도 통일교 대지에 대한 재 감정을 받은 결과 처음에 보상금이 1천 만원으로 결정된 것을 약 2천 4백만 원으로 받았습니다. 평당 보상가격이 1백만원이었는데 2백 40만원 가격으로 보상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협회와 재단에서는 저에게 지금까지 이렇게 승리한 일이 없다며 수고했다고 하였습니다. 재단과 협회 전문가도 못하는 일을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저는 1995년 8월 25일 합동 결혼식을 한 36만 쌍 중에서 합동결혼식을했지만 신앙이 없고 교회에 나오지도 않는 사람을 전부 수습하였습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고 이혼을 한 가정과 가정이 파탄된 가정도 수습하여 아들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올린 가정을 심방하고 돌볼 때 언제나 제 옆에는 영도교회 이진상 순회사가 있었습니다. 이진상 순회사는 저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여호수아가 모세의 손발이 되었듯이 저의 손발이 되어 애를 썼습니다. 미진상 순회사의 부인인 하진희 회장도 저의 뜻이라면 '아멘!' 하고 무엇이든지 순종하고 따라주었습니다. 제가 영도교회를 떠난지도 2년이 흘렀지만 이진상, 하진희 회장과 이상희 부인회장은 아직도 명절 때와 제 생일에 정성을 모아서 서울에 있는 저에게 선물을 보내곤 합니다. 부모 형제도 이렇게 정성을 모으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 신앙목사생활 30년이 되었지만 통일교 안에서 이진상 순 회사와 하진희 회장과 같은 신앙 자를 아직까지 저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만사람에게 등불이 되는 신앙자 입니다. 이광철 집사와 아내 되는 이상희 영도 통일교 부인 회장도 제가 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상희 부인 회장은 사명의식이 강하고 영도 통일교 어머니로서 새로 전도된 통일교 교인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저는 1996년 3월 9일~1998년 8월 2일까지 약 2년 5개월 동안 영도 통일교에서 혼자 자취를 하면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은 시장을 다녀와 일주일 먹을 김치를 담그고 국 한 솥을 끓여 놓고 매주 불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은 제가 떠날 때까지 영도 통일교 살림과 저의 식사를 맡아서 수고하였습니다. 영도 통일교 부인 교인들도 제가 식사할때 먹으라고 반찬 준비를 많이 해왔습니다. 이진상 순회사와 이광철 회장이 주축이 되어 저에게 중고 자동차를 사주었습니다. 제가 버스를 타고 다니고 심방을 할 때면 영도섬 전체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골목길과 오르막길을 걸어 다니기가 힘에 겨웠습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사주셨기 때문에 예배, 기도, 전도, 심방을 자동차로 기동성 있게 많이 하였습니다. 저는 부주의로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죽을 뻔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서울집에 자가용을 가지고 오르내릴 때마다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게 되어 졸면서 운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위험천만한 위기의 순간도 많았습니다. 경부 고속도로를 달릴때 빗 길에 미끄러지고 눈길에 미끄러져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습니다. 1998년 음력 1월 6일 문선명 78회 탄신기념 행사를 해야 했습니다. 1월4일날 저는 행사준비를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서울에서 구정 명절이어서 자녀 3명에게 세뱃돈 1만원씩을 주고 나니 제 지갑에는 7만원 밖에 없었습니다. 명절에 가족들과 같이 쉬고 1월 4일날 아침에 출발하는데 기름 5만 5천원을 넣고 남은 돈이 1만 5천원 밖에 없었습니다. 고속도로비를 내고 나면 딱 맞게 부산 영도까지 내려갈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서울에는 눈이 안 왔지만 전날 밤에 전남 지방과 충청도 지방에는 눈이 많이 왔었습니다 서울에서 아침 일찍 나서야 부산에 해지기 전에 도착 할 수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오후에 출발하고 싶었지만 추운 겨울이라 빨리 부산 영도까지 도착하려고 아침에 나섰습니다. 서울 집에서 아침 9시에 출발하여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화성(오산) 까지는 눈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눈이 오지 않아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화성 밑으로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체인도 감지 않고 시속 70km로 3차선을 달리다 천안 인터체인지 입구에서 2차선으로 차선변경을 하는 순간 차가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속도로는 큰 버스나 트럭으로 인해 아스팔트에 구덩이가 파져 있었습니다. 제가 100m 거리인 경사진 도로를 미끄러져 내려갈 때 주위에 수많은 차들이 불을 켜고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불을 켜고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 고만 기도하였습니다. 차와 같이 미끄러져 내려가면서도 정신을 차려야 산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차가 100m를 지그재그로 밀려 내려가면서도 옆 차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고 마지막에 브레이크를 잡았습니다. 차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방향이었는데 차가 유턴하여 차 머리는 2차선에서 3차선으로 들어와 3차선과 갓 길에 걸쳐져 서울로 가는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살려달라!' 고 기도 하였던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차는 수많은 차들과 연쇄 충돌 하지도 않고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기적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차가 멈춰 섰을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30분을 정신이 없이 멍해 있다가 차에서 내려 차를 뒤로 밀어서 천안 인터체인지 다리밑 눈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부산 방향으로 다시 차를 틀어 3차선으로만 천천히 갔습니다. 영동 밑 추풍령에서 부터는 눈이 쌓여 있지 않아 부산까지 안전하게 내려갔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회에 제가 목사로 부임하여 이진실, 하진희 회장과 이철, 이상희 회장 두 가정을 가지고 영도 통일교에 발전과 부흥을 위하여 심히 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영도 통일교는 2년만에 120명의 교회로 부흥 발전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영도 통일교가 최하위 교회였는데 최고 A급 교회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갔을 때는 총 헌금도 교회 관리비와 공과금 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산의 통일교에서 영도교회 재직회가 목사 생활비를 제일 많이 주게 되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최고 책임자의 말 한마디 약속을 믿고 혼자서 부산 영교로 폐인이 된 몸을 이끌고 내려가 가족들과 떨어져도 영도교회에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돌아오는 것은 약속을 밥먹」기는 통일교 최고 책임자의 배신행위로 또다시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 두 번 속은 것도 아니요, 통일교에서 수없이 많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왜 또 속고 내려왔는지 저는 제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바보 천치라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자책을 해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던 것입니다.
제 3 절 죽음의 자리에서 두 천사의 도움으로 구한 생명 시간이 흐른 후 제가 서울에서 부산 영도 통일교로 발령을 밭은 것은 저에게는 또 한번의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싸움을 해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심장병과 간, 위장병, 불면증을 기도로서 다스리며 기적같이 죽지 않고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옆에서 돌보아 주어도 제 자신을 지탱할 수 없고 건강이좋지 않아 쓰러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와서 자취 생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혼자서 자취를 하며 빨래와 청소,심방, 전도, 교회 부흥 · 발전, 승공 연합, 각종 세미나, 강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영도교회에서 1996년 3월 10일 취임을 하자마자 매일 3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며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전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제가 혼자서 의 ·식 ·주를 해결한다는 것이 어려웠고 혼자과로를 하며 먹지 못한 상태에서 1인 5역을 한다는 것이 무리였습니다. 그래도 영도교회는 나날이 교인이 늘어나고 발전하며 새로운 교인들이 영도 통일교로 많이 입교하여 넘치는 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저는 신바람이 나게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과로하며 먹지 못하여 1996년4월 20일 독감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심장병에는 독감이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저는 1996년 3월 17일 셋째주 주일 예배 광고 시간에 하나님은 저에게 음성으로 "감기 조심하라" 며 경고 했다고 교인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독감 감기까지도 조심 하라고 알려주고 계신다고 교인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과로하지 말고 음식 조절하여 독감을 주의를 하였어야 했습니다. 1996년 3월 10일~4월 20일까지 40일은 제 몸과 마음 전부를 바쳐 충성한 기간이었습니다. 밤낮 없이 심방하고 전도하고 기도하며 교회 발전과 부흥을 위해 새벽 1시~2시까지 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4월 20일부터 5월 30일까지 40일 동안을 감기에 걸려 생활해야 했습니다. 누워 잠을 자면 기침이 심하게 나서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질식의 순간이 여러 번 있어 책상 의자에 앉아 잠을 자지 않고 살았습니다. 40일은 제가 심장병으로 생사의 기로에서 살기 위한 구원의 몸부림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었으나 나중에는 밥을 한 숟갈 정도밖에 먹을 수 없었고 국물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영도 통일교 교인들에게는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은 감기가 걸린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목사님이 감기가 걸려서 잘 드셔야 된다고 회나 반찬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심장 판막 4개 중 1개가 정지되었고 심부전증으로 식사나 먹은 물을 대소변으로 배출하지 못하였습니다. 심장기능이 저하되어 숨을쉴 수 없고 1층에서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설교나 심방, 전도, 기도는 처음과 같이 열심히 하였습니다. 부산 영도 교인들은 진실하고 인정스러운 마음으로 염소보약, 일반 보약까지 지어 왔습니다. 밥을 먹지 못해서 링겔 주사를 7병이나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몸이 죽음의 기로에 서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호흡 곤란으로 열 발자국도 걸을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몸은 고무풍선 같이 부었기 때문에 65kg에서 85kg이 되었습니다. 저의 배는 만삭이 되어 아기를 낳기 직전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1996년 5월 10일 그 날도 역시 책상에 엎드려 잠시 잠을 자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비몽사몽간에 검은 옷을 입은 4명의 저승사자들이 제게 와서"이제 너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4명이 양쪽에서 저의 팔을 붙들었습니다. 저는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4명에게 끌려가는 중 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명의 천사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천사들은 큰 칼을 빼어들고 4명의 검은 복장을 한 저승사자들에게 저를 데려 갈 수 없다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4명의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에게 칼을 휘둘러 4명을 전부 죽였습니다. 저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저는 2명의 천사에게 "저의 생명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천사들은 저에게 "앞으로 당신이 할 일이 많기 때문에 구해준 것입니다. " 하고는 순식간에 제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저는 비몽사몽간에 깨어나 하나님께서 저를 저승에 데려가지 않고 죽음에서 생명을 구해줄 것을 확신하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상희 부인 회장이나 교인들이 제가 심한 독감에 걸린 1996년 4월 20일 이후부터 반찬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이미 심장병과 간담석증, 위장병, 불면증을 가지고 있는 상태여서 혼자 무모하게 부산 영도교회에 와서 자취 생활 한 것이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너무나 처절하고 비참하며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아내가 옆에서 병간호를 해주어도 목회활동하기가 어려운데 혼자 자취 하면서도 영도교회 부흥발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심전력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심장병이 악화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기 조심하라" 고 저에게 경고를 하였는데도 저는 무관심하게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2명의 천사를 통해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저를 사지에서 생명을 구해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부산에서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 병원으로 갔습니다 응급실에 입원을 하여 응급 처치를 받았습니다. 심장기능이 약화되어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제대로 심장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심장에 고인 물부터 제거하기 위하여 저의 등에 구멍을 뚫어 척추를 관통하고 허파를 지나 호스를 집에 넣고 물부터 빼내었습니다. 병원에서 심장병 치료를 받은 후 부산 영도교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병원에 입원 중 서울에 저를 아는 분들과 부산 영도 교인들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 통일교 황선조 협회장과 부산 교구장인 김용갑에 대하여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통일교로 말미암아 폐인이 되어 심장병으로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 병원으로 입원하였지만 통일교 협회에서는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부산의 김용갑 교구장이 협회에 보고를 하였는데 단 한 사람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병원 수술비를 한푼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잔인한 곳은 없습니다. 김용갑 교구장도 부산에서 서울로 와서 교구장 회의에 참석하면서도 회의만 참석하고 저의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서울 청파동 회의 장소에서 고대 안암 병원은 불과 30분 거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용갑 교구장은 부산 시내 통일교 전체 목사들을 대표하는 지도자입니다. 저는 김용갑 교구장의 부하였습니다.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들이 서울까지 한명도 문병을 오지 않았다 할지라도 김용갑 교구장은 서울회의까지 왔으면서도 저의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저와 같이 1972년부터 충북 기동대 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충북 기동대는 통일교 목사가 되기 위한 6개월 훈련과정입니다. 그런 김용갑은 정성호 전임 부산 교구장과 같은 고향 진주 출신이라며 강력하게 협회장에게 추천하여 교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김용갑이 교구장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였습니다. 제가 1996년 3월 9일 부산 교구본부에 들렸을 때 김용갑은 부교회장 이였습니다. 저는 처음 김용갑 얼굴을 보았을 때 계시가 나왔었습니다. 저는 바로 김용갑이 교구장이 된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김용갑은 통일교 협회에서 1월 달에 전국 통일교 교구장 인사이동이 있는데 1년 후에나 있지, 그전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용갑은 이번에 바로 교구장이 되면 감사보답으로 저에게 크게 한턱을 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교구장이 되면 제가 서울에서 영도까지 내려온 것은 제 뜻이 아니라 하늘 뜻이니 제가 서울에 올라갈 때까지 마음이나 상하게 하지 않게 해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그런 예언을 한 후 한달 만인 4월 달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선배 통일교 지도자들과 교구장들을 전 세계 185개국의 국가 메시아로 발령을 하였습니다. 정성호 부산교구장이 떠나면서 김용갑을 부산 교구장으로 협회에 추천하여 교구장이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 후 부산에 내려와 김용갑 교구장에게 병원비를 협회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협회에서 병원비를 받아 주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몇일이 지나서 협회에서 병원비를 지원해 줄수 없다고 잘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고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서울의 교구장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듣고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에게 날짜를 설명했더니 그때서야 김용갑 교구장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서울 회의에 참석을 했다고 말하였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이 미안하다고 사과만 하였더라도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원비도 지원해 준다고 약속을 해놓고 왜 지원하지 않느냐고 말을 했더니 그때서야 억지로 조금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일 김용갑 교구장은 제 버릇 개 못 주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충고를 하고 조언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